도스토예프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을 읽히는 19세기 소설가로 꼽힌다. 스스로 ‘지적인 프롤레타리아’라 부른 도스토예프스키는 누구 못지않은 시련을 겪은 문학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육군 공병학교를 졸업한 그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마저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터였다. 작달막한 키에 금발과 작은 회색 눈, 신경질적으로 실룩거리는 입술, 병색마저 감도는 얼굴, 그리고 가난. 그의 젊은 삶은 그렇듯 불안정했다.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의 강압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상주의자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금요일마다 열리는 개혁 토론회에 참석했다. 당시 서유럽을 휩쓴 혁명의 여파를 우려한 정부는 금요 집회 회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1849년 9월, 218명의 정치범들 가운데 21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그 가운데는 도스토예프스키도 끼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6번째였습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1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때의 상황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는 살아났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면을 알리는 황제의 칙령이 낭독된 것이었다. 그는 이후 시베리아의 옴스크 유형지에서 4년의 강제 노동과 또 4년의 군복무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실과 운명에 지지 않았다. 처형과 강제 노동에 이르는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은 오히려 그에게 엄청난 엔진이 되었다. 아내를 죽인 혐의로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은 한 남자의 회고 형식의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을 비롯해 〈학대받는 사람들〉, 〈지하 생활자의 수기〉 등을 써낸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간질병을 앓고 있었고, 연이은 연애와 실패, 거기다가 심한 도박 중독에도 빠져 있었다. 독일의 카지노에서 옷을 저당 잡힐 정도로 빚에 시달리던 그는 출판업자들에게 소설을 써 줄테니 돈을 달라고 끊임없이 애원했다. 〈죄와 벌〉, 〈악령〉 등 많은 명작들은 그리하여 탄생되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불후의 명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마친 몇 달 뒤인 1881년 2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눈을 감았다.
시련은 마치 바람과 같아서 언제든 누구에게나 불어올 수가 있다. 달구어지지 않고 두드려지지 않으면 강철이 될 수가 없다고 한다. 니체도, 말로도, 사르트르도 그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시련을 위대함과 맞바꾼 큰 인물임에 틀림없다.
지금 너는 바람 속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너는 이미 스스로 큰 그릇을 구울 예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