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꼬박 두 달이다. 지난 2월 1일 군부는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아웅산 수치 고문을 구금하고, 1년 간의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군부는 의회를 해산했고, 언론을 통제했다. 핸드폰으로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을 차단했다. 시민들은 은행, 병원, 관공서 등에서 파업을 벌이고, 세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매일 거리로 나온다. 지금까지 미얀마 시민 500명 이상이 숨졌고, 2천500여 명이 체포됐다고 전해진다. ‘미얀마군의 날’이자 ‘저항의 날’인 지난 3월 27일 ‘시민 저항의 날’ 시위에서만 100명이 넘는 시민이 숨졌다. 군부는 부상자를 불구덩이에 내던지고, 장례식장에 급습해 총을 쏘기도 했다. 어린이의 사망 소식도 끊이지 않는다. 2021년의 미얀마에서 1980년 광주가 재현된 것이다. 처참한 유혈사태를 목격한 이후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은 “미얀마 주민에 대한 혐오스러운 폭력을 규탄한다”라며 민주 정부가 복귀할 때까지 미얀마와의 교역 협정 이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도 “미얀마 보안군은 맹목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의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라며 유럽 등 국제사회 파트너들과 미얀마에
2021년 재보궐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재보궐선거는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천216만 명의 유권자가 참여하는 엄청난 규모여서 사실상 2022년 대선의 전초전으로 여겨진다. 특히 서울과 부산은 여당 소속 지자체장이 나란히 성추행으로 물러나 공석이 된 상황이라, 수성하려는 여당과 탈환을 노리는 야당 사이의 각축전이 과열 양상을 보여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는 각각 ‘도쿄 아파트’와 ‘내곡동 땅’을 두고 부동산 투기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그러나 각자의 도덕성 검증과 불법행위 여부가 논쟁의 핵심이 된 사이, 정책과 비전 경쟁이 설 자리는 점차 협소해지고 있다. 두 후보 모두 부동산 민심 악화를 의식한 듯 너나 할 것 없이 ‘재개발’을 외치고 있고, 나란히 건축 규제를 완화할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후보 진영 간 공약에 뚜렷한 차이를 확인할 수 없고 상호 간의 비방만이 오가는 선거전의 최대 피해자는 물론 우리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선거 풍경은 독재정권 종식으로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한 1990년대부터 꾸준히 지적돼왔다. ’92년 3월 24일자 <계명대신문>의 ‘
‘갱즈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은 1800년대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슬럼가였던 뉴욕의 Five Points라는 동네의 생활을 다룬 영화입니다. 평소 우리는 뉴욕이라고 하면 대체로 Fifth Avenue에 있는 명품관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과 같은 화려한 것들을 먼저 떠올립니다. 반면 뉴요커들은 슬럼가였던 파이브 포인트(Five points)라는 동네의 역사가 뉴욕을 대표한다고 얘기합니다. 그 이유는 1세대 이민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자녀들을 중산층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던 파이브 포인트에서의 서바이버 정신의 DNA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바로 뉴요커이고, 진정한 뉴욕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 영화는 수많은 이민자가 성공을 꿈꾸며 찾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던 토착민들과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주 갈등은 빌 더 버처(Bill the butcher)라는 별명을 가진 윌리엄 커팅이라는 사람이 이끄는 반 아일랜드 정서를 가진 잉글리시 갱단과 데드 레빗(Dead Rabbits)이라고 하는 아일랜드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갱단 사이의 싸움입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소설 제목을 패러디해 여러분께 던진다. 코로나19와 더불어 살기 시작한 지난 1년이 지나고 새롭게 맞이한 신학기에 이렇게 묻는 것이 뜬금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씩 세상을 약간만 삐딱하게 바라보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가 보이진 않을까? 노자의 도경 1장에 道可道 非常道라는 문구가 있다.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참 많은 사람이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정치가, 기업가, 의료인, 학자들은 마치 자신만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주장하고 반 시민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이 마치 전문가인 양 주장하면서 다른 이의 견해를 무시하곤 한다. 고용인은 자신이 부리는 사람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근로자를 선호하고, 피고용인은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는 의미로 노동자를 선호한다. 같은 사람인데 마치 다른 사람인 양 근로자와 노동자를 외친다.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기도 하는 노자가 우리 시대에 나타난다면 앞서 주장하는 사람들이 도를 따르고 있다고 인정할
나는 종교가 없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초월적인 존재와 구원에 대한 믿음이 없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구원자를 희구하기엔 내 삶이 너무나 짧고, 그 구원자의 마음에 들고자 허위의 신심을 드높이기엔 내 양심이 그렇게까지 보잘것없지 않아서다. 그래도 만에 하나 구원자가 실존하고 내세에 천국과 지옥의 구분이 있다면, 나는 불신의 대가로 지옥에 떨어질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심판의 날이 오면 불신자인 나는 아마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대구에 살면서 다져진 더위 내성이 이렇게 빛을 발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그 작열하는 불구덩이에는 단체협약도 없이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뿔 달린 악마가 기거한다던데, 훈련소 조교만큼 무서울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면서. 물론 사탄은 그보다 훨씬 무섭고 사악한 존재겠지만, 그 스테레오 타입으로 훈련소 조교밖에 떠올리지 못한 것은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나의 빈약한 상상력 탓이겠다. 최근 북구 대현동에 건축 중이던 이슬람 사원의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원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출신 무슬림 6명과 한국인 1명 등 건축주 7명이 지난해 12월부터 착
‘등록금 인상’이 화제가 되는 시대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현재 심의가 완료된 대학 134곳 중 133곳이 등록금 동결 혹은 인하를 결정했다. 134곳 중 인상을 결정한 대학이 1곳에 불과한 것인데, 등록금을 인상하면 국가장학금 및 재정지원사업에서 불이익을 받는 상황에서 이뤄진 인상이라 이목을 끈다. 이 대학은 입학금 인하에 따른 수입 감소와 학생 정원 감소 등을 고려해 등록금 인상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이 줄어든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0여 년 전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의 주도로 시작된 ‘반값 등록금’ 운동이 일부 성과를 거두면서, 정부가 등록금 인상률을 국가장학금 및 재정지원사업과 연계시킴에 따라 동결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같은 조치에도 한국의 대학 등록금 순위는 미국, 호주, 일본에 이어 네 번째로 높아 그 부담이 가볍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국가장학금도, 정부가 주선하는 대출도 없던 시대의 등록금은 대학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당시 등록금 협상은 차라리 ‘전쟁’에 가까웠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대학이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牛骨塔, 소를 팔아 세운 건물)’
쿠팡 주식을 얼마나 사야 할까. 코로나19 시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 쿠팡이기에 많은 이들이 상장을 기대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다음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고용한 건실한 기업이기도 하다. 쿠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상장 신청서를 내던 날,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한국 유니콘 기업의 쾌거’라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경북 칠곡 쿠팡 대구물류센터에서 1년 넘게 야간 알바를 해 온 고 장덕준(27) 씨는 숨진 지 4개월이 지나서야 쿠팡 뉴스룸을 통해 공식 사과를 받을 수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장 씨의 죽음이 산업재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장 씨는 물류센터에서 지원 업무를 하는 이른바 ‘워터 스파이더’였다. 집품부터 포장-푸시-레일-박스-리빈-리배치로 이어지는 업무가 중단 없이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수동 자키를 이용해 바구니 정리, 빈 카트 정리, 포장 부자재 보충, 층간 부자재 운반 등을 했다. 이 중 하나라도 실수하면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장 씨의 사망 전 일주일 동안 평균 근무시간은 62시간 10분, 사망 12주 전에는 58시간 38분이다. 그는 하루에 470kg 이상 물건을 운반했다. 지난
뉴스는 신선한 놀라움! 신문기자로 20여 년 일하면서 이 뉴스 격언은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칫 단순하게 되풀이되기 쉬운 일상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뉴스가 하기 때문이다. 온갖 대중매체(매스미디어)를 통해 뉴스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신선한 놀라움은 뉴스가 현실과 대결하는 에너지이다. 나는 뉴스를 <일상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태도와 노력>으로 정의한다. 국어사전은 일상(日常)을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라고 풀이한다. 일상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뉴스마인드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풀이는 일상의 소중함을 맥빠지게 만든다. 일(日)은 태양의 움직임이다. 상(常)은 한결같이 떳떳함이다. 일상은 태양의 햇빛과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 태양이 날마다 지구에 떳떳함을 준다면 우리는 일상의 새로움으로 태양을 마주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태양과 맺는 이 같은 관계를 ‘일상의 새로움을 위한 뉴스마인드’라고 규정한다. 태양의 움직임이 한결같이 떳떳하다면 나의 삶도 한결같이 떳떳해야 비로소 진정한 일상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일상의 단순 반복은 뉴스의 적(敵)이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태양을 마주하면서 현실과 대결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서는(비욘드, bey
나의 스물한 살. 수험생 시절 그토록 고대했던 새내기 캠퍼스 생활을 뒤로하고 온 세상에 만연한 전염병과 싸우며 얼떨결에 맞은 나이. 나를 비롯한 올해의 스물한 살들은 교실의 책걸상에서만 벗어났을 뿐 여전히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서 주춤하고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어른이 되어가야 할 스무 살을 집에서 흘려보냈으니 우리는 일 년 유예됐을 뿐 여전히 ‘스무 살’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해 춘삼월, 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무 경력도 없는 갓 스무 살이라 여러 번의 낙방은 각오했건만 운 좋게 처음으로 면접을 본 곳에서 나를 고용해주었다. 비록 아르바이트이지만 무언가 혼자 책임져야 할 위치가 되었다는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붕 뜨게 했고 그만큼 부담감도 막중했다. 처음에는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막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고등학교 동창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힘듦을 격려하고 위로하다 보니 어느새 경력이 일 년 가까이 쌓인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최근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친구들도 여럿 있다. 내 11년지기 친구는 일주일 전 음식점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하필 일을 배우러 간 첫 날에
올 2월 국내에서 시작된 코로나19 감염증의 유행으로 인해 1학기에 임시방편으로 시작된 대학의 원격수업이 결국 2학기까지 이어져 곧 종강을 앞두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들이 초연결사회의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으나 미처 그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던 대학교육이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인해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학기 초기 원격수업의 기술적 시행착오가 많이 줄었고, 교수와 학생 모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수업환경에 빠르게 적응해 가면서 원격수업의 장점과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격수업 간의 질적 편차와 학생들의 학습(환경)격차, 소통 부족의 문제, 원격수업 인프라의 부족 문제 등은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많은 전문가가 코로나19와 같은 유사한 팬데믹 쇼크 상황이 재발될 가능성이 있음을 예측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언택트, 비대면 생활양식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뉴 노멀(New Normal)이 될 것이다. 이미 학생들은 소위 인강세대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 데 익숙하며, 이들이 사회에 나가면 온라인으
‘대학언론의 위기’라는 말로 대학언론을 진단하는 건 부정확하다. 위기는 위험한 시기나 고비를 뜻하는데 대학언론은 그런 단계를 논할 시기를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학언론 위기론은 대학가에서조차 족히 20년은 넘게 다뤄지고 있는 진부한 주제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대학언론의 역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뾰족한 대안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대학언론인을 하염없이 움츠러들게 만든다. 대학언론 위기론은 이미 위기론이 아닌 현실이다. 수습기자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는 기자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가장 큰 고민거리다. 매년 줄어드는 인원을 유지하는 것마저 버거웠음은 물론이다. ‘이 이상의 후퇴는 없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펜을 붙잡고 악착같이 버텨야 했다. 그러나 답보 상태의 대학언론에서는 그러한 노력들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대학언론이 독자들로부터 멀어진 탓이다. 미디어 환경은 지난 수년간 천지개벽 수준으로 변화했다. 대학 밖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구축하고 나섰다. 하지만 대학언론은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변화를 주도하지 못해 기자가 줄어들었고, 독자를 잃었으며, 이제는 매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