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소설로 표현했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삶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단어는 ‘불행’이었다. 유대인 상인 헤르만 카프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 형이 어려서 죽었으므로 세 여동생 앞에서 맏이로서의 역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인물이었다. 어머니 또한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고된 사업을 거들고 있었지만 아들의 ‘글쓰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카프카는 그런 아버지를 자신의 작품 속에 투영시켰다. 물질적 성공과 사회적 출세 외에는 바랄 것이 없는 거칠고 오만한 상점 주인 아버지는 소설 속에서 거인족의 일원으로, 무섭고 혐오스러운 폭군으로 등장한다. 소심하고 온순한 소년 카프카는 규율이 엄격한 알트슈테터 슈타츠 김나지움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권위주의적인 제도와 기계적인 학습과 인문과학을 비인간화시키는 교육이 못마땅했고, 프라하대학의 법학 공부도 애정 없이 치를 뿐이었다. 유대인이기에 프라하의 독일인 사회에서도 소외되고, 지식인이기에 유대의 유산으로부터도 소외되었던 것이 카프카의 삶이었다. 청년 카프카는 보험회사에서 일을 시작했으나 긴 근무 시간과 엄격한 요구 사항들은 늘 그의 목을 죄는 밧줄이었다. 2
도스토예프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을 읽히는 19세기 소설가로 꼽힌다. 스스로 ‘지적인 프롤레타리아’라 부른 도스토예프스키는 누구 못지않은 시련을 겪은 문학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육군 공병학교를 졸업한 그는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마저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터였다. 작달막한 키에 금발과 작은 회색 눈, 신경질적으로 실룩거리는 입술, 병색마저 감도는 얼굴, 그리고 가난. 그의 젊은 삶은 그렇듯 불안정했다.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의 강압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상주의자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금요일마다 열리는 개혁 토론회에 참석했다. 당시 서유럽을 휩쓴 혁명의 여파를 우려한 정부는 금요 집회 회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1849년 9월, 218명의 정치범들 가운데 21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그 가운데는 도스토예프스키도 끼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6번째였습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1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왠지 두 눈에 물기를 머금게 하던 릴케의 ‘가을날’이다. 지금 이 시를 읊조릴 수 있다면 너는 분명 아름답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좋은 시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은 찬란한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릴케와 루 살로메의 사랑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니체의 청혼을 거절했던 당시의 유명작가 루 살로메는 릴케보다 14세 연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1897년 당시 22세의 병약한 무명시인 릴케를 선택했고, 그들은 뮌헨 근교의 농가에서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보낸다. 둘은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 여행을 했고, 여기에서 릴케는 시인으로서의 숨은 감성들을 만나게 된다. 그
한 번 청소했다고 해서 방 안이 언제나 깨끗한 채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도 그렇다. 한 번 반성했다고 해서 그 맑음이 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어제 가진 좋은 뜻이라 할지라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를 떠나고 만다. 모스크바의 톨스토이 박물관을 가장 많이 찾는 외국인은 한국인이라고 한다. 발표된 지 150년이나 되는 작품들이 오늘날 새삼 밀리언셀러가 되는 것을 보면 한국인들은 톨스토이를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런 톨스토이는 성찰과 반성과 실행의 대가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톨스토이는 친척들의 손에 자랐다. 20세 때 톨스토이는 군인이던 형을 따라 입대했고, 거기에서 청소년들의 도덕적 타락을 그린 ‘유년시절’, ‘소년시절’, ‘청년시절’을 썼다. 1857년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톨스토이는 러시아 농민의 열악한 교육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어 고향에다 농민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었다.1862년 결혼 후 15년 동안 창작에 전념하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내놓았다. 여기에서 톨스토이는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하나? 원수를 갚는 것이 정의로운가? 삶에 대한 탐구는 그로
일본 최대의 호황기. 그때 일본 경제를 앞장서 이끈 인물이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다. 우리나라 사람 역시 그의 브랜드 ‘내셔널’과 ‘파나소닉’을 한번쯤 써보지 않은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4학년때 학업을 중단하고 살길을 찾아 오사카로 갔다. 소년 마쓰시타는 구두닦이, 사환 등으로 지내다가 17세 무렵인 1910년 오사카전등(大阪電燈)의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1918년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조그마한 전기용품 공장을 차렸다. 전기 소켓을 만드는 작은 규모의 작업장이었다. 남의 회사에 다닐 때는 쉬워 보였는데, 막상 직접해보니 운영이 쉽지 않았다. 자재비, 임대료, 인건비 등의 자금은 늘 달랑달랑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마쓰시타는 이런저런 걱정에 싸여 골목길을 힘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때 어느 집에선가 두 자매가 다투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날아왔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자매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한 사람은 다리미를 먼저 쓰겠다고 했고, 한 사람은 드라이어를 먼저 쓰겠다고 싸우는 중이었다. 당시는 전기기구를 쓰려면 일반적으로 백열전구를 끼우는, 이른바 ‘소켓’에
몇 년 전 라는 영화로 젊은이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레이 찰스(Ray Charles). 13번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블루스(blues)와 솔(soul) 음악의 아버지로 일컫는 그는 참으로 험한 성장기를 보냈다. 일곱 살 무렵 시력을 잃어버린 그는 노동자였던 아버지를 여읜 뒤 어둠 속의 아들에게 삶의 방법을 가르치던 어머니마저 잃게 되었다. 대공황기 빈민가의 흑인 고아에게 주어졌을 고통의 무게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세 살 무렵 이웃 카페의 피아노와 인연을 맺었던 레이 찰스는 블루스 밴드를 따라다니며 미국 전역을 방랑했다. 그러면서 색소폰, 트럼펫, 클라리넷, 오르간 등 닥치는 대로 연주를 하며 나름대로의 음악적 소양을 쌓아갔다. 열여덟 살 때 처음 무대에 선 이후 그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들의 수는 빠른 속도로 늘어갔다. 그는 흑인 음악을 대변하던 솔을 현대적으로 해석했고, 리듬 앤드 블루스를 가스펠과 결합시켰으며, 백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컨트리와 웨스턴까지 흡수했다. 그러면서 점점 세계의 뮤지션들이 우러르는 자리로 올라갔다.그만큼 고독했던 것일까. 그는 장애와 인종 차별은 극복했으나 헤로인 투약으로 세 번 구속되었고 정신병원 생활도 했다. 그 어려운
1870년, 16세의 어린 랭보는 고향 아르덴을 떠나 파리로 갔다. 무임승차 혐의로 며칠을 감옥에서 지낸 그는 국민군에 들어가서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이듬해 겨울 다시 파리로 가서 굶다시피 하며 지내던 랭보는 시인 폴 베를렌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많은 문인들을 만났지만 방탕하고 음탕하다는 손가락질만 받았다. 10살 위인 베를렌과 동성애를 나누며 갈등의 일상을 보내던 랭보는 결국 베를렌의 총을 맞은 뒤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썼다. 이 시집은 1873년 벨기에에서 펴냈으나 인쇄업자에게 줄 돈조차 건질 수도 없었다. 1874년, 20세의 랭보는 런던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잡일을 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계속했다.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서인도 제도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했으며, 독일 서커스단과 함께 스칸디나비아로 갔다가 키프로스 섬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키프로스 섬에서 건축 현장 감독으로 취직도 했다가, 커피 무역상에게 고용되어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에 들어갔다. 거기서 랭보는 언젠가는 편안하게 지내리라 꿈꾸었다. 그 무렵, 베를렌은 잡지에 ‘일뤼미나시옹’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를 ‘고(故) 아르튀르
춤은 인류가 가장 먼저 만들어낸 원초적인 예술 양식일 것이다. 어떤 도구도 없이 그저 몸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무용은 미술, 음악, 문학 등 다른 분야에 비하면 훨씬 늦게 현대화되었다. 다른 장르의 예술들이 초현실주의나 다다이즘 따위를 거치면서 현대화의 세례를 흠뻑 받았다면, 무용은 1920년대 즈음에서야 비로소 큰 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 있던 무용계에 변혁의 바람을 몰고 온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미국의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이다. 그레이엄은 무용에 있어서 두 가지 혁신의 모습을 보였다. 하나는 정형을 고수하는 고전 발레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는 기예 정도로만 여기던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민속 무용에 대한 관심과 포용이었다. 그녀는 전설적인 무용학교 데니숀(Denis-Shawn)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레이엄은 움직임의 이론을 세우고 동양의 무용을 서양의 것과 접목하면서 음악의 시각화를 시도했다.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고 “나는 이 그림처럼 춤을 추겠다”고 했다. 예술에 있어서 독창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기만의 의상과 무대장치와 소도구 등
1969년 여름, 뉴욕 근교의 우드스톡에서 음악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로 이 음악제는 무산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막스 야스거라는 이가 베델의 자기 농장을 제공하겠노라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음악제는 가까스로 베델 평원에서 열렸고, 그것은 역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큰 무대로 남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드스톡(Woodstock)’이라 이름 붙여진 록 페스티벌이다.3박 4일 동안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45만 명의 관중은 열광했다. 온갖 장르의 가수와 밴드들의 연주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8월 18일 오전, 마지막 무대는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나온 깡마른 젊은이의 시간이었다. 그의 이름은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 높다란 무대 위에 나타난 검은 청년은 천천히 미국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청중들은 당혹스러웠다. 록 페스티벌에 국가라니!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이상한 굉음처럼 변해 갔다. 폭격 소리, 폭발 소리로 변주되는 사운드는 더 이상 한 나라의 엄숙한 노래일 수 없었다. 그것은 상징이었고, 저항이었고, 호소였다. 록(rock)을 즐기는 이들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지미 핸드릭스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
“나는 사업미술가가 되고 싶었다. 사업은 가장 매혹적인 예술의 하나다.” ‘팝아트’라는 말을 미술의 한 장르에다 올려놓은 앤디 워홀은 그렇게 말했다. 얼핏 예술과 사업은 그리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낱말이지만 그는 당당하게도 스스로를 미술사업가라고 불렀다. 워홀에 대한 비판은 만만치 않았다. 상당수의 비평가들은 그를 무자비한 상업주의와 출세지상주의에 물든 사기꾼쯤으로 대했다. 그는 그런 비난들을 수긍했다. 예술품에 따라다니는 천재와 영감이라는 아우라를 부정했고, 순수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부정했다. “나의 예술은 거짓이었다. 종이에 아무렇게나 선을 긋고 관념적인 단어를 나열하면 관객들은 보물을 얻은 듯 그림을 거꾸로 걸어두고도 좋아했기 때문이다.”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작업을 돕는 이들을 ‘예술 노동자’라 칭했다. 그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남의 스튜디오를 방문한다고 털어놓으면서, 미술 잡지를 보는 것이나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나 다를 것이 뭐냐고 되물었다. 때로는 자신의 사인을 어머니에게 맡기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성어인 드렐라(Drella)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캠벨 수프 깡통과 코카콜라 병과
흔히 그러하듯이, 갑갑한 청춘이었다. 무엇이 불안한 내 정신을 풀어줄까? 스무 살 무렵, 마치 날벌레처럼 흐르다가 문득 집어들었던 책,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 ‘정신분석’이라는 말을 만들어내면서, 지금까지도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이 프로이트다. 그는 대단한 일을 해낸 이들 중에서 흔치 않게 어려서부터 줄곧 상위권에서 놀던 인물이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내 아들의 발가락이 내 머리보다 영리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프로이트는 책을 많이 읽었다. 법학을 전공하기로 한 그는 괴테의 을 읽으면서 마음을 바꾸었다. 자연을 가리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 비유한 그 위대한 송가가 그를 자연과학도로 만든 셈이었다. 그는 넉넉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곧잘 문학작품 같은 편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보내곤 했는데, 이것은 후일 방대한 저작을 이루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1896년, 40세가 된 프로이트는 스스로 ‘최고로 중요하고 독창적인 저서’라고 표현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내가 운 좋게 발견한 것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을 담게 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걸작이라고 장담했던 책의 제목은 이었다. 이 책은 4년 뒤, 새로운 세기가 막 시작되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