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의 미륵사지에서 2k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사연이 많은 아주 고풍스러운 백제계 석탑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국보 289호 높이 8,5m). 이 탑이 있는 벌판은 백제시대 왕궁이 있던 곳으로 왕궁평이라 불리던 곳이다. 전해지기로는 백제 무왕이 이곳에 왕궁을 지어 천도하려 했다는 설과 무왕이 별궁으로 축조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 탑은 1965년 해체 수리될 때 탑의 여러 곳에서 사리공이 발견돼 관심을 끌었다. 1층 지붕돌에서 2개의 사리공이 있었고, 기단부에 3개의 사리공이 품(品)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석탑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유물들을 해독한 결과 이 탑이 건립되기까지 몇 번의 큰 변화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인지 이 탑은 건립시기가 백제 후기, 통일신라, 고려 초기 등 서로 엇갈리고 있다. 먼저 양식적인 면에서 보면 이 탑은 정림사지탑의 모양을 매우 닮아 있어 백제계 탑임을 쉽게 짐작케 한다. 5층탑, 낮은 단층 기단, 몸돌에 비해 넓고 얇은 지붕돌, 지붕돌의 반전 형식 등이 백제양식이다. 특히 기단부의 품자형 사리공은 백제 목탑의 유물이며, 지붕돌의 사리공은 석탑의 유산이다. 그러나 탑을 짜맞추는 수법과 지붕돌 받침의 수법이 통일신라
경남 합천댐 부근에 황매산이라고 하는 매우 아름다운 산이 있다. 이 산은 붉은 매화 빛을 띠고 있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으로서 등산객들이 자주 찾는다. 산의 남쪽 자락에 통일신라시대 때 지어진 절로 보이는 영암사라는 옛 절터가 있고, 여기에 아름답기 그지 없는 쌍사자 석등과 3층석탑이 있다. 이 두 개의 조각품은 목탑으로 만들어진 대웅전 앞에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들이 법당의 전면에 탑을 배치하여 주된 건축물로 삼았는데 이 절에서는 쌍사자 석등이 중심 건축물로 보인다. 석등의 위치를 탑이 있는 곳보다 높게, 돌출되게 석축을 쌓아 석등이 돋보이게 설계했다. 석등으로 오르는 석축의 좌우에 무지개 모양의 통돌 계단을 만들어 빼어난 미감을 자랑하고 있다. 석등을 이런 방법으로 설계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석등의 아래쪽에는 붉은 빛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3층석탑이 한 기 외롭게 서있다. 무너져 있던 탑을 1969년에 복원하였는데 상륜부만 없어졌고 나머지는 온전하다. 이 탑은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고, 갓기둥과 안기둥을 새겼다. 탑신은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통돌로 되어 있고, 지붕돌의 층급이 4단으로 돼있어 신라 석탑의 전성기가 조금
팔공산은 신라5악의 하나로서 삼국시대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꼽혀왔다. 그래서 골마다 절간이 있고, 고풍스런 탑들이 솟아있다. 송림사는 팔공산의 서쪽 끝자락 칠곡에 있고 여기서 순환도로가 시작되니 대구사람에게 송림사는 팔공산 관광의 출발점이 된다.송림사에는 우리나라에서 드문 통일신라시대의 전탑(벽돌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높이 16m). 우리나라는 원래 석탑의 나라여서 전탑은 5기에 불과하다. 송립사전탑은 감실이 없다. 원래 감실이 있었는데 여러 번의 보수작업과정에서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륜부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초기 전탑의 형태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송림사전탑은 1959년에 크게 보수하였는데 이때 발굴된 사리함은 감은사의 사리함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명품으로 인정될 만큼 뛰어난 예술성과 세련된 장식성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부처님의 몸을 그 무덤으로 인도하는 상여모양이다. 금관의 장식으로 쓰이는 불꽃문양이 머리 부분을 덮고 있고, 아래쪽은 복련으로 덮여있는 기단과 그 위로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있다. 가운데는 초록의 유리병(잔)과 그 속에 작은 사리병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슬람의 수입품으로 보기도 하나 이미 신라에
사찰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형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당의 뒤쪽에 부도형의 사리탑을 만드는 형식으로 이곳을 계단으로 삼아 신성시한다. 다른 하나는 불탑에 사리를 봉안하여 법당 앞에 세우는데 대부분의 사찰들이 이 형식을 따지만 경배의 중심은 불상이고 탑은 이차적이다.경주의 나원리에는 8세기초에 만들어진 10미터 높이의 장대한 탑이 언덕위에 우뚝 솟아 있다(국보 39호). 동시대 신라의 탑들이 3층인데 비해 이 탑은 5층이다. 상륜부는 사라졌지만 기단부와 탑신부가 매우 온전하게 남아있다. 1,300년이 지난 지금도 하얀 피부를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나원 백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탑은 거대한 몸집에 비해 매우 단정한 모습이고, 낮은 2중기단 위에 비례감이 뛰어난 구조와 안정감을 갖고 있는 당대의 수작이다. 탑을 보고 있으면 훤칠하고 잘생긴 대장부의 기상을 느낀다.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탑이 서 있는 장소가 높은 언덕 위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불탑은 법당의 앞에 위치하는데 이 탑은 법당의 뒤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탑이 언덕배기 위에 세워져 그 뒤로 법당이 설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덕 아래 법당을 세우고 법당
미륵사지 석탑은 장대함과 독특한 건축양식, 목탑을 모방한 구조뿐만 아니라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설화가 물들어 있는 특별한 탑이다. 이 탑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이 되는 탑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해체과정에서 정림사지 석탑에 비해 더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은 무왕대에 유행하던 9층목탑의 형식을 완벽하게 석탑의 형태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사방에 감실을 두고 가운데에 심주를 둔 구조나 기둥돌, 벽면, 지붕돌 등에서 목탑의 형식이 확연히 나타난다. 그래서 탑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는 필수적인 탑이다.무왕과 선화공주가 익산의 용화산 밑 연못가를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연못 가운데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선화공주가 이곳에 절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미륵사와 탑을 세웠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이 탑은 역사 외에 설화라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얹어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이 탑의 사리장치가 발견되고 그 가운데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어 이 탑의 역사에 새로운 해석이 보태졌다. 특히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돼 있고,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남원의 지리산 자락에 있는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풍수지리설에 의해 세워졌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땅의 기운이 이곳에 모여 일본으로 건너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석탑과 석등을 세우고, 법당의 종과 철조여래좌상을 만들었다. 법당의 종에 일본열도를 그려 넣어 두드릴 때마다 지기가 흩어지도록 했고, 법당 앞에는 다른 절에서 보기 어려운 큰 석등과 8.4m에 이르는 높은 탑을 두 기나 세워 지기를 눌렀다. 그리고 약사전에는 높이가 2.7m에 이르는 큰 무쇠 부처(철조여래좌상)를 수미단 없이 땅바닥에 세워 지기를 누르게 하였다. 우리 민족이 일본을 얼마나 경계해 왔는가를 문무왕의 수중왕릉과 이 절이 극명하게 말해준다.실상사 3층석탑은 탑의 역사에서도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으로서 원형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탑 중의 하나이다. 8세기 중엽 불국사 석가탑 이후 석가탑의 모양을 모방한 탑들이 전국에 세워지게 된다. 실상사 탑도 석가탑을 모방하였기 때문에 석가탑과 흡사하다. 1966년 석가탑이 해체·복원될 때 사라지고 없는 상륜부를 복원하기로 하였고, 실상사 탑은 그 모델이 되었다. 복원된 석가탑의
예천 읍내를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강가 들판에 높이 4m가 조금 넘는 아담하지만 기품 있는 5층탑이 외롭게 서 있다. 이 탑은 서민적인 조각 기법과 함께, 탑의 조성 배경과 시기, 기부자나 기여자의 명부가 적혀 있다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탑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탑이 있으나 건립배경과 시기, 기부자 명단이 적혀 있는(塔記) 탑은 이 탑이 유일하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탑의 건립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탑의 규모가 줄어들고, 건립의 주체가 지방 호족이나 유지가 된다. 대개는 건립비용을 이들이 부담한다. 이러한 사실은 탑지(塔誌)에 기록되고 탑에 봉안되기도 하고, 사찰의 역사에 기록되기도 한다.그런데 개심사지 5층석탑은 탑기가 새겨진 위치가 특별하다. 탑의 상층 기단부를 덮고 있는 덮개돌 아래에 모두 190자에 이르는 명문이 적혀 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예천군 호장인 임장부의 어머니가 발원하였고, 좋은 사리를 구하여 예천군민과 다인현민으로 구성된 향도 및 광군조직을 동원해 탑을 지었다는 내용과 함께, 탑의 건립에 기여한 여러 이름이 같이 적혀져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 덮개돌의 아래쪽 면에 적혀 있어서 탑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했다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에는 신라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두 가지 걸작이 있다. 곧 석가탑과 다보탑(혜공왕 때 건립, 765~780)이다. 석가탑은 신라 정형석탑의 전형으로서 장식이 없고 단순하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 왼쪽에 다양한 기교를 부려서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세련된 모습의 다보탑이 있다. 이 탑을 다보탑이라 한 것은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와 나란히 앉아 석가의 설법(석가탑)을 증명하는 뜻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탑 동쪽에 다보탑을 세워 불교적 상징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한편, 다보여래는 칠보탑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칠보탑(七寶塔)으로도 불린다. 불국사 대웅전의 앞마당에서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어울려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사유세계를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신라인의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석가탑은 통돌을 사용해 막힌 구조를 하고 있지만 다보탑은 다양한 석재로 기둥을 세우고 짜 맞춰 열린 공간구조를 보여준다. 아울러 탑의 설계는 기하학적인 비례인 8:4:2:1의 등비급수의 비율로 구성돼 있다.탑의 형태는 기단부가 4각형이며, 1·2·3층은 8각
오늘날 백제의 탑은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과 익산 왕궁리9층석탑이 남아있다. 후자는 복원하기 위해 해체돼 있어 지금 볼 수 있는 탑은 정림사탑 밖에 없다. 이 탑은 미륵사탑 이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해 왔으나 최근 미륵사탑이 해체되면서 오히려 미륵사탑보다 더 오래된 탑으로 확인되었다. 이 탑은 7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한국 정형 석탑의 시원이 되는 탑으로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국보 9호). 이 탑은 백제계 탑의 일반적 형식인 낮은 단층기단의 5층탑으로서 이후 만들어지는 백제계 탑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당의 소정방이 ‘당의 백제 정벌 기념탑’이라는 글귀를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탑은 법당(혹은 목탑)의 형식을 석탑으로 표현한 최초의 탑으로서 한국 석탑의 여러 가지 전형을 세웠다. 기단부와 탑신의 몸돌에 갓기둥과 안기둥을 새겨 법당의 기둥을 형상화 했고, 배흘림기법을 표현하여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아래로 층급을 주어 법당의 부연과 서까래를 연상케 했으며, 네 모서리를 살짝 치켜 올려 날아 가는듯한 상승감을 주었다. 우리나라 특유의 창조적 모형이다. 전체적으로 장중함보다는 우아하고 세련
선덕여왕은 재위 중 황룡사 9층목탑, 분황사석탑, 첨성대 등 세 개의 건축물을 지었다. 이 중에서 분황사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가장 초기 작품으로 한국 불교미술사에 남을 건조물로 유명하지만, 이 탑에 봉안된 사리장치 중에는 선덕여왕 개인의 유물이 포함돼 있어 더욱 주목을 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석탑으로 이러한 예는 분황사탑이 유일하다. 이 탑은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게 쪼개어 중국의 전탑처럼 쌓아올린 모전석탑으로서 처음엔 7층이나 9층쯤 되는 규모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3층까지 남아있다. 1915년 이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중심부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많은 공양구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는 뜻밖에도 금·은바늘, 가위, 실패 등의 여인이 쓰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바로 선덕여왕의 것이다. 탑 속에는 부처님의 사리, 불경, 소탑, 옥이나 구슬, 그리고 부처님의 공양에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간다. 그런데 왜 선덕여왕의 사유물이 탑 속에 봉안되었을까? 우리는 이 탑을 통해 신라불교의 왕즉불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에 불교가 뿌리를 내릴 때 토착종교와 지배계층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불법과 왕법이 하나이며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이 생기게
구례 화엄사 각황전 뒤쪽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섬진강 푸른 줄기가 한 눈에 들어오고 동백나무 숲이 아름다운 곳에 효대가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4사자3층석탑이 있다. 나는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지리산 종주 등반 중 화엄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는데, 그 때 이 탑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 아름다움에 곧 매료되었다. 4사자석탑은 다보탑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모습과 하층 기단에서 1층 몸돌에 이르기까지 조각된 각종 상징들의 빼어난 예술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탑은 그 예술성보다 우리나라의 어떤 탑에서도 볼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더 유명하다. 상층 기단 네 모서리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탑신을 받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미소 지으며 합장하고 있는 대덕(大德)상이 있다. 바로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조사의 어머니로서 당신에게 공양하는 사랑하는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탑의 아래쪽에는 석등이 있고, 꿇어앉아 어머니께 공양하고 있는 연기조사가 조각돼 있다.......(앞부분 생략)천 년을 한결같이 비가 오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