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추령고개를 넘어 감포로 가다보면 바다가 아련히 보이는 벌판에 덩그러니 서있는 두 기의 탑이 보인다. 항상 몇 명의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있는 그곳이 바로 감은사지이고 그 두 기의 탑이 감은사지 3층석탑이다. 이 탑은 역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조형미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지만 호국정신과 신문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마음 깊숙이 와 닿는 탑이다.감은사는 신문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왜구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용이 되고자 했던 아버지의 유언대로 동해에 장례(수중왕릉)를 지내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감은사(感恩寺)라 이름 지은 절이다.신문왕의 효심은 이 절터의 여러 곳에 나타난다. 절 아래쪽으로 물길을 만들고 대웅전의 바닥에 쉼터를 만들어 호국용이 된 아버지가 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수중왕릉이 보이는 언덕 위에 이견대를 세우고, 매년 수차례 이 지역을 참배했다. 신문왕의 효심은 두 기의 석탑에도 이어진다. 부왕의 업적을 기념하는 장대한 석탑을 만들고 그 안에 10과의 진신사리, 40여 개의 구슬, 그리고 신의 솜씨에 비유되는 화려한 조각기법의 사리함 등 수많은 국보급 사리장치를 봉안하였다. 그래서 이 탑은 불탑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개막식은 중국이 세계 최초의 과학적 발명품이라고 자랑하는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주제로 60억 지구인에게 펼쳐 보이면서 시작되었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세계 최초의 인쇄술 발명국은 우리나라이다. 인쇄술은 금속활자인쇄술과 목판인쇄술로 나누는데, 금속활자인쇄술은 이미 「직지심경」(1379년)이 세계 최초로 공인되었고, 목판인쇄술도 석가탑 덕분에 세계 최초로 확인되고 있다.원래 이름이 무구정광탑인 석가탑은 신라 석탑의 완성판이라고 할 만큼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고, 탑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도 많다. 1966년 9월 어느 날 밤, 도굴꾼들이 석가탑을 도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 철수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10월에 석가탑의 해체,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 발견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보수작업과정에서 2층 몸돌에서 사리함을 비롯한 아름다운 사리장엄구들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 있었다. 이 경전은 길이 약 650㎝, 폭 6.5~6.7㎝의 세련된 서체로 인쇄된 조그만 두루마리이다. 이 경전에는 당의 측천무후가 만들어 사용했던 신제자(新
우리는 때때로 여행을 한다. 여행길에서 산사를 찾고 여기서 크거나 작은, 혹은 소박하거나 우아한 탑을 만난다. 진지한 얼굴로 합장을 하고 탑 주위를 도는 사람들도 만난다. 절집이 다 비슷하듯이 탑들도 다 닮아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합장을 하고 탑돌이 하는 모습에는 별 다른 관심없이 기념사진 하나 찍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그러나 사실 탑들도 저마다 다른 사연과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탑의 아름다움과 탑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여행을 떠나보자.탑은 부처님의 무덤이다. 석가가 열반에 든 다음 화장을 하고 무덤을 만들었다. 나중에 석가를 사모하던 사람들의 순례행렬이 이어지자 무덤을 장식한 것이 탑의 시초이다. 그래서 탑 속에는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안치한다. 물론 화려한 장식의 사리함이나 불경, 소탑, 구슬 등의 공양물도 함께 넣었다. 불상이 기원 후 1세기 때 만들어졌으니 탑은 이보다 몇 백년 먼저 만들어진 불교의 숭배대상이다. 사람들이 탑돌이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도의 탑은 아쇼카 왕대에 크게 번성하였고, 이어 이웃 나라로 전파돼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탑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나라별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