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읍내를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강가 들판에 높이 4m가 조금 넘는 아담하지만 기품 있는 5층탑이 외롭게 서 있다. 이 탑은 서민적인 조각 기법과 함께, 탑의 조성 배경과 시기, 기부자나 기여자의 명부가 적혀 있다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탑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탑이 있으나 건립배경과 시기, 기부자 명단이 적혀 있는(塔記) 탑은 이 탑이 유일하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탑의 건립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탑의 규모가 줄어들고, 건립의 주체가 지방 호족이나 유지가 된다. 대개는 건립비용을 이들이 부담한다. 이러한 사실은 탑지(塔誌)에 기록되고 탑에 봉안되기도 하고, 사찰의 역사에 기록되기도 한다.
그런데 개심사지 5층석탑은 탑기가 새겨진 위치가 특별하다. 탑의 상층 기단부를 덮고 있는 덮개돌 아래에 모두 190자에 이르는 명문이 적혀 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예천군 호장인 임장부의 어머니가 발원하였고, 좋은 사리를 구하여 예천군민과 다인현민으로 구성된 향도 및 광군조직을 동원해 탑을 지었다는 내용과 함께, 탑의 건립에 기여한 여러 이름이 같이 적혀져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 덮개돌의 아래쪽 면에 적혀 있어서 탑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림에서 보듯이 탑의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에는 십이지신상과 8부중상이 아름답게 부조돼 있다. 만일 기여자의 이름을 탑의 바깥에 새겼다면 이런 조각상은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이 탑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을 감추며 얼마나 겸손해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어느 누구인들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싶지 않으랴. 그래서 요즘 건립되는 탑들은 대개 웅장한 자태를 뽐내지만 영락없이 기단부나 몸돌에 기부자의 이름이 크게는 주먹만한 글자로 새겨져 도배하듯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탑은 천년이 지나도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는다. 오늘날 기부자들은 이제 천박함을 버리고 겸손한 기부정신을 이 탑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이 탑은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준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