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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과 분황사탑

선덕여왕은 재위 중 황룡사 9층목탑, 분황사석탑, 첨성대 등 세 개의 건축물을 지었다. 이 중에서 분황사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가장 초기 작품으로 한국 불교미술사에 남을 건조물로 유명하지만, 이 탑에 봉안된 사리장치 중에는 선덕여왕 개인의 유물이 포함돼 있어 더욱 주목을 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석탑으로 이러한 예는 분황사탑이 유일하다.
이 탑은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게 쪼개어 중국의 전탑처럼 쌓아올린 모전석탑으로서 처음엔 7층이나 9층쯤 되는 규모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3층까지 남아있다. 1915년 이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중심부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많은 공양구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는 뜻밖에도 금·은바늘, 가위, 실패 등의 여인이 쓰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바로 선덕여왕의 것이다. 탑 속에는 부처님의 사리, 불경, 소탑, 옥이나 구슬, 그리고 부처님의 공양에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간다. 그런데 왜 선덕여왕의 사유물이 탑 속에 봉안되었을까?
우리는 이 탑을 통해 신라불교의 왕즉불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에 불교가 뿌리를 내릴 때 토착종교와 지배계층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불법과 왕법이 하나이며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이 생기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서 유난히 신라가 호국불교로 번영을 누리게 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부처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은 이름이 백정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바로 석가모니의 아버지가 백정이며, 어머니가 마야부인이다. 이들은 석가와 같은 아들을 얼마나 바랐겠는가? 이런 환경은 여왕이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부처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절의 탑에 자신이 쓰던 물건을 사리장엄구로 넣었던 것이다.

경주 남산 기슭에 다른 부처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감실부처비위가 바로 선덕여왕이라는 설이 전해져 온다. 감은사탑이 문무왕의 기념탑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진성여왕과 애인 위홍의 쌍둥이 부처도 최근 발견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당시 신라사회의 왕즉불 사상을 실감케 한다.




[사설] 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지식의 습득은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 정보를 수집해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읽기다. 각 대학들이 철학, 역사,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인문·예술적 소양이 없으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고전과 명저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교과 과정으로 끌어들여 왔다. 고전과 명저란 역사와 세월을 통해 걸러진 책들이며,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저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하는 정신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고전과 명저라 할 수 있다. 각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하는 등의 특별 전형을 통해 면접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인문학책을 토대로 지원자들 간의 토론 또는 면접관과의 토론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등 어느 때보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학과 예술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