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의 지리산 자락에 있는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풍수지리설에 의해 세워졌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땅의 기운이 이곳에 모여 일본으로 건너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석탑과 석등을 세우고, 법당의 종과 철조여래좌상을 만들었다.
법당의 종에 일본열도를 그려 넣어 두드릴 때마다 지기가 흩어지도록 했고, 법당 앞에는 다른 절에서 보기 어려운 큰 석등과 8.4m에 이르는 높은 탑을 두 기나 세워 지기를 눌렀다. 그리고 약사전에는 높이가 2.7m에 이르는 큰 무쇠 부처(철조여래좌상)를 수미단 없이 땅바닥에 세워 지기를 누르게 하였다. 우리 민족이 일본을 얼마나 경계해 왔는가를 문무왕의 수중왕릉과 이 절이 극명하게 말해준다.
실상사 3층석탑은 탑의 역사에서도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으로서 원형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탑 중의 하나이다. 8세기 중엽 불국사 석가탑 이후 석가탑의 모양을 모방한 탑들이 전국에 세워지게 된다. 실상사 탑도 석가탑을 모방하였기 때문에 석가탑과 흡사하다.
1966년 석가탑이 해체·복원될 때 사라지고 없는 상륜부를 복원하기로 하였고, 실상사 탑은 그 모델이 되었다. 복원된 석가탑의 비례는 완벽할 정도로 조화로웠다. 그런데 모델이 된 실상사 동탑이나 서탑의 경우는 사실 비례가 조금 어긋나 있다. 실상사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비례에서 상륜부가 지나치게 높고 둔중해서 탑신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다. 탑의 사진을 가만히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석가탑은 상륜부가 없이 8.4m이지만 실상사 탑은 상륜부를 합쳐 8.4m이다. 그런데도 실상사 탑이 석가탑의 상륜부를 크기까지 모방했으니 이런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상사 탑은 매우 절제된 우아함을 보여준다. 탑은 장중하거나 질박하지 않지만 화려하거나 가볍지도 않다. 이 두 요소가 적당히 배합돼 있다.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선이 여성적인 탑이다. 그런데 오늘날 만들어진 탑에는 왜 이런 느낌들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