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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과 선화공주


미륵사지 석탑은 장대함과 독특한 건축양식, 목탑을 모방한 구조뿐만 아니라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설화가 물들어 있는 특별한 탑이다. 이 탑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이 되는 탑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해체과정에서 정림사지 석탑에 비해 더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은 무왕대에 유행하던 9층목탑의 형식을 완벽하게 석탑의 형태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사방에 감실을 두고 가운데에 심주를 둔 구조나 기둥돌, 벽면, 지붕돌 등에서 목탑의 형식이 확연히 나타난다. 그래서 탑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는 필수적인 탑이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익산의 용화산 밑 연못가를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연못 가운데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선화공주가 이곳에 절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미륵사와 탑을 세웠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이 탑은 역사 외에 설화라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얹어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이 탑의 사리장치가 발견되고 그 가운데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어 이 탑의 역사에 새로운 해석이 보태졌다. 특히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돼 있고,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고 적혀있다.

선화공주는 어디 갔을까? 앞으로 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삼국유사의 모든 기록이 미륵사의 존재형식과 일치하는데 오직 왕후 부분만 다르다. 정략결혼설, 복수의 왕비, 좌평의 딸은 선화공주 사후의 일 등 여러 설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이라도 당시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전투 때문에 선화공주가 왕비로서 온전한 역할을 했을까?

앞으로 어떤 형식으로든 정리가 되겠지만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는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똑같은 사실이라도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심화가 된다. 신화가 사라진 역사는 얼마나 삭막할까?




[사설] 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지식의 습득은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 정보를 수집해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읽기다. 각 대학들이 철학, 역사,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인문·예술적 소양이 없으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고전과 명저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교과 과정으로 끌어들여 왔다. 고전과 명저란 역사와 세월을 통해 걸러진 책들이며,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저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하는 정신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고전과 명저라 할 수 있다. 각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하는 등의 특별 전형을 통해 면접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인문학책을 토대로 지원자들 간의 토론 또는 면접관과의 토론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등 어느 때보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학과 예술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