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또다시 사형제를 편들었다. 1996년에도, 14년만인 지난 2월 25일에도 헌법재판소는 사형제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대한민국은 사형제가 정당화된 나라이다. 사실상 사형 폐지국이라는 어렵게 지켜낸 명예는 법의 판단 앞에 언제든 뒤집힐 수 있게 됐다. 사형폐지를 향해 나아가는 전 세계적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헌재 결정에 실망했다는 비난이 해외에서까지 쏟아졌지만 뉴스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 다음날 밴쿠버에서 김연아가 황홀한 연기로 최고점 기록을 갈아치우며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과 뉴스가 동계올림픽과 김연아 소식으로 도배되었다. 대규모 스포츠 행사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모든 매체를 단일 뉴스로 봉쇄하는 일이 이번에도 반복되었다. 동계올림픽 전부터 ‘김연아가 금메달 따면 가장 기뻐할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항간의 우스개도 있었다. 사형제 합헌 결정 발표의 타이밍이 절묘하다. 정말 금메달감이었다. 며칠 전 부산 여중생 살해피의자 김길태가 검거됐다. 그의 죄질을 따지기 전에 다만 이 분노한 여론을 ‘사형제 부활’ 같은 최악의 사태에 이용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걱정이 앞선다. 대한민국은 요즘 낙태 문제
가족은 함께 살지 못하게 됐을 때 절절한 그리움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가족의 그림자에 발목을 잡힌다. 조국도 마찬가지다. 버림받았을 때 비로소 내 목숨보다 소중한 무엇이 된다.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졌을 때 소중해지는 게 어디 가족과 조국뿐이랴. 영화 <의형제>는 한국의 분단문제를 일상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린 영화다. 이혼으로 전처와 딸을 영국으로 보내고 홀로 사는 이한규(송강호 분)나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남파간첩 송지원(강동원 분)의 고통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라니! 분단은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도 엄연한 현실이다. 송지원의 가족상봉이 북핵과 온갖 정치적 사안, 살인음모, 국제사회의 반응까지 충돌하는 운명적 장애물들의 연속이라면, 이한규의 가족 해체는 극히 사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는 차츰 이 둘의 경계를 지우더니 어느 순간 둘을 똑같이 외로운 ‘기러기’ 아빠로 만들어버렸다. 아니 외로운 외톨이, 버림받은 조직을 여전히 동경하는 갈 곳 없는 용도폐기물로 동질화시킨다. 살인기계 ‘그림자’조차 실은 버려진 인생일 뿐이다. 그림자가 말하는 충성은 일제의 카미카제 특공대를 연상시킨다. 시대착오적이며 사회적 관계망을 놓친 ‘오리알’에 불
드라마는 생물이다. 살아 움직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한다. 2009년 한국 드라마는 그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지금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 심지어 방영 중에도 수시로 실시간 평가들을 다음 회에 반영하는 순발력 등은 놀랍다. 막장드라마 논란 또한 인간의 욕망과 심리에 충실한, 특히 여성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면 불편해 하는 우리사회의 편견이 문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고정관념을 깨고 그 어느 때보다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악역의 진보는 눈부실 정도다.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찬란한 유산>은 2009년 현재 한국 대중의 욕망을 꿰뚫었다. 그리고 착하게 살면 은인을 만나고 부자로 복 받고 산다는, 만고의 도덕을 실감나고 세련되게 그려냈다. 쉬울 것 같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한국형 극작술이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상황을 물샐틈없이 짜버리고, 악역에게는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악역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했다. 선한 사람들은 진정성 하나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선덕여왕>은 방영전의 모든 선입견을 깼다. 사극의 ‘여성판’이거나 <대장
MBC <선덕여왕> (극본 김영현 박상연 / 연출 박홍균 김근홍)은 현재 최고의 화제작이다. 연말에 대부분의 상을 석권할 것으로 보인다. 신라 최초의 여왕 덕만공주의 이야기가 이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줄 방영 전에는 아무도 예상 못했다. 무엇보다 역사 속의 선덕여왕은 공주 시절은 물론 재위 중에도 그리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 않았다. 제작진은 덕만공주의 평범하고 무난한 위인전 식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이야기를 짜 넣었다. <선덕여왕>은 작가에 의해 역사와도 별개의, 실제 덕만공주와도 전혀 별개의 별스럽고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잔인하고 살얼음판 같은 냉엄한 권력싸움을 다룬 야심작으로 거듭났다. 왕보다 더 능력 있고 야심에 찬 여성권력가 미실을 설정함으로써 극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파워게임의 연속으로 흘러왔다. 초반의 인물구도나 상황설정은 흥미로웠다.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통일신라로 이끈 주춧돌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력을 다해 기 싸움, 머리싸움을 벌이는 내용 전개는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했다. 대하 역사극임에도 캐릭터의 생생함이나 현란한 대사,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교훈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코미디영화다. 변변히 '웃긴' 장면 하나 없다고 불평하는 관객들이 꽤 있는데, 모르는 말씀이다. 이 영화가 '코미디'가 아니라면 'SF'란 말인가?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현실에서 가장 멀리 있는 극단적이고 환상적인 코드들만 모아놓은 이 영화는 발상 자체가 코미디인 것이다. 볼 때는 우습지만 보고 나면 독하고 쓴 슬픔이 몰려오는 블랙코미디라고나 할까. 장진 감독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이 '유쾌하게' 펼쳐진다는 이 영화의 '대통령'은 의외로 단독 주인공조차 차지하지 못한다. 세 명의 대통령이 무슨 대역배우나 재연배우처럼 잠시 무대에 섰다 사라진다.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이순재나 장동건, 고두심처럼 으리으리한 배우가 아니고서는 인상에 남지조차 못할 캐스팅이다. 만일 주연상을 준다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지 관객이 고민해야 할 지경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주어진 대사만을 3분의 1로 한정된 ‘임기’ 안에서 재주껏 펼쳐 보일 뿐이다. 감독은 그들에게 ‘주인공’이 될 인상적인 미션으로 자기희생을 떠맡겼다. 마치 누가누가 더 희생 잘 하나를 내기하는 형국이다. 평생 쫓기고 쪼들리며 살았던 민주투사 출신 김정호(이순재 분
KBS 일일드라마 <다함께 차차차>는 교통사고로 한날 한시에 과부가 된 두 동서가 서로 의지하며 한씨 ‘집안’을 꾸려가는 모습이 기둥 줄거리다. 남편을 잃은 두 동서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형태는 기존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홀로 된 엄마들의 ‘강한 모정의 힘’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던 <다함께 차차차>는 새로운 시도에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형적인 일일드라마가 왜 선호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일일드라마의 안정적인 구도― 조부모와 부모가 모두 건재한 ‘전통적’ 대가족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일일드라마의 중심에 놓인 가족들은 대개 별 탈 없어 보이는 집에 자녀들이 부모의 뜻을 거스른 연애와 결혼이 문제가 돼 갈등이 벌어지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이런 안정적인 구도를 깨며 일부러 결핍으로부터 가족애를 끌어내는 방식을 택했다. ‘유쾌한 가족드라마’를 표방했지만 쌍과부가 연상시키는 우울함과 비극성을 어떻게 ‘유쾌한 가족’ 이야기로 엮을 수 있을지도 부담이었다. 일부러 일일드라마의 ‘관습’들을 피해가며 다소 낯선 가족구도, ‘아버지’가
국립 예술학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정권이 바뀌면 학과의 존폐여부도 교수의 ‘성향’도 커리큘럼도 ‘알아서’ 바뀌어야 한다. 이 때문에 문화체육부였던 시절에 세워진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문화관광부의 철퇴를 맞았다. 지난 5월 18일, 문화관광부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감사 결과를 언론에 알리면서, 이 학교가 문화관광부 ‘소속’이며 유인촌 장관의 직접적인 권한 내에 있음을 온 세상에 천명했다. 감사 결과에는 ‘이론과 축소 폐지, 서사창작과 폐지, U-AT 통섭 교육 중지 및 관련 교수 징계’ 등 12건의 주의, 개선, 징계 처분이 들어있었다. 다음날 황지우 총장은 자진 사퇴했다. 교수직까지 박탈당한 황 전 총장은, 이번 2학기 수업을 강사자격으로 신청했으나 학교당국으로부터 ‘교수 지위 확인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강의 불허를 통보받았다. 현재 ‘한예종 사태’는 박종원 신임 총장 체제로 가면서 겉으로는 일단락된 듯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술렁인다. 학교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 지금껏 훌륭한 예술가로 존경해 왔던 스승들에 대한 ‘자질 시비’ ‘사상 시비’가 이미 학생들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놓았다. 사실 이번 사태는 이명박 정
거인이 가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하신 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셨다. 아니, 이제야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그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평생 질기게 따라 다니던 ‘비방’과 ‘혐의’들도 꼬리를 내렸다. 국장은 참으로 차분하고 숙연했으며 조용하되 깊은 슬픔이 있었다. 나라의 큰 어른을 보내는 이번 국장을 통해 국민들도 한층 성숙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의 마지막까지 ‘행동하는 양심’이었고, 그의 노벨상 수상 소감처럼 그는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여생을 바치셨다. 우리나라에 이런 분이 계셨다는 것을 역사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거인을 추모하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끊어질듯 위태로웠던 남북의 길도 북의 조문단 파견으로 새 전기를 맞았다. 한 사람의 진정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울리고 움직일 수 있는지, 그는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의 수많은 인연들은 그가 억울하고 슬픈 사람의 마지막 피난처였다며 그와의 사연들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그의 인생은 반쪽의 칭송과 반쪽의 일방적 폄훼가 엇갈려 있었다. 한국인의 숙원이었던 노벨상을 수상하고도 헛된 비방들이 노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정치가가 ‘살아있는 영혼’일 수 있으며 아름다운 바보일 수 있다는 것을 끝내 안 믿었다. 그를 믿어주기엔 우리가 살아낸 역사가 너무 척박했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식지 않는 추모열기의 근원에는 깊은 죄책감이 있다. 그의 일관된 진정성을 믿지 않고 정치로 제 잇속 차리는 똑같은 ‘잡놈’ ‘도둑놈’으로 몰아간 것, 자신의 가치 전체를 부정당하고 결국 홀로 벼랑 끝에 서게 한 것에 대해 많은 국민이 가책을 느끼는 듯하다. 우리는 뒤늦게 오열하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에는 슬프고 또 슬펐을 한 인간의 고뇌가 절절히 보였다.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홀로 떠나셨습니까?” 노무현의 고독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운명’이었다. 그의 고뇌와 결단, 성난 외침은 적과 동지 모두에게 외면받기 일쑤였다.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 양산, FTA체결 등 시대의 거센 격랑을 거부할 수 없는 ‘위정자’로서의 진정성은 지지자들에게 먼저 버림받았다. 정책결정자로서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해 기울였던 온갖 노력은 ‘너도 똑같은 놈’이라는
그것은 꿈이었다. 대통령 퇴임 후 고향마을에 돌아가 평범한 ‘아저씨’로 살아가고 싶다는 ‘희망’은 정녕 꿈이었다. 애달픈 헛꿈이었다. 온 국민의 염원이었고 본인 필생의 목표였던 ‘시골 아저씨’로서의 삶은 퇴임 1년여 만에 자살로 막을 내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의 비참한 말로 중에서도 가장 처참하다. 투신 직후 이미 소생불가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결연한 의지로 산에 올랐는가를 보여준다. ‘시도’만으로 그치거나 괴로운 심경을 엿보이는 정도의 행위를 할 뜻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살 뜻이 전혀 없는 자의 선택이었다. 삶에 조금도 미련이 남지 않았던 듯하다. 그럼에도 이 비보를 믿을 수가 없다. 경호원이 눈을 돌린 그 찰나에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는 게 진정 전직 대통령의 최후란 말인가? 한때의 최고 권력자가 삶에 미련을 버리게 만드는 데 대한민국에서는 1년이면 족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으며 스스로 내놓지 않는 이상 권력자의 부정축재는 환수받을 수 없는 나라에서 그는 최근에 심지어 학살의 주범인 독재자보다 더 나쁜 놈으로 몰리기까지 했다. 한나라당 정치인들은 가장 최근의 기억만을 모든 판단의 잣대로 삼았다. 최근 대통령이었
우승연이라는 신인여배우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가족은 빈소 공개도 막은 채 ‘조용한 장례’를 강력하게 원했다. 인터넷 얼짱 출신의 젊디젊은 여배우의 사인은 역시 우울증이었다. 유가족은 모든 의혹이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덕분에 우승연의 이름과 자취는 비교적 조용히 묻혔다. 그런데 이것이 고인의 죽기 전 상황이나 심경이 ‘조용’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라면 억측일까. 묻고 싶다. 한국에서 신인여배우는 사람인가, 물건인가? 똑같은 사인(死因)과 똑같은 사후처리방식, 똑같은 미스터리 속에 그녀들은 꽃다운 영정사진으로 남았다. 4월24일 ‘장자연리스트’에 대한 수사발표가 있은 지 사흘만에 우승연은 세상을 버렸다. 서둘러 끝낸 수사결과는 삼척동자도 비웃을 수준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산 자들은 발 뻗고 자라는 식이었다. 이 땅에서 신인여배우는 공공의 재화에 불과하며 오히려 ‘못 먹는’ 놈이 바보라는 것. 편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한 자들은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라는 홍보를 검찰이 대놓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예인이 작성한 ‘리스트’는 향후 쓰레기통 밖에 갈 곳이 없다는 일축이었다. 죽은 자는 침묵을 지키지 않을 경우, 죽어서도 난도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