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냉전의 종식 직후 프랜시스 후쿠야마(Yoshihiro 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으로 대표되는 서방 세계의 낙관적인 주장들을 비판하고 세계정세의 변화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문명의 충돌’을 집필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중심논지는 ‘탈냉전 시대에 사상 최초로 세계정치가 다극화·다문명화 되었으며, 문명 정체성이 탈냉전 세계에서 전개되는 결집, 분열, 갈등의 양상을 규정한다.’는 주장이다. 헌팅턴은 종교가 문명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성이라는 전제 하에 탈냉전 세계의 주요 문명을 중화 문명(중국 문명), 일본 문명, 힌두 문명, 이슬람 문명, 정교 문명, 서구 문명, 라틴아메리카 문명, 아프리카 문명으로 나눈다. 경제 성장에 힘입은 아시아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슬람이 서구 주도의 세계 질서에 대해 도전하게 됨에 따라, 서구 문명은 이슬람 문명 및 중화 문명과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헌팅턴은 전망한다. 탈냉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쟁의 원인을 상이한 문명 사이의 충돌로 보는 헌팅턴의 이러한 해석은, 한편으로는 경제적 갈등과 그에 따른 정치적 역학 관계를 간과했거나 호도했다는 비판을 받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 이후 세계정세의 변화를 진단하고 분석하려는 학자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21세기 초반인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로 더욱 각광을 받았으며, 최근 이슬람 세력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폭력 사태(IS테러 포함)를 해석하는 틀로 작용하고 있다.
헌팅턴 자신이 밝힌 이 책의 집필 동기와 주장은 일견 가치중립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계정세의 변화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는 것은 이미 세계관과 가치관을 내포한 정치적 기획이다. 헌팅턴은 문명 패러다임이 한시적 수명의 유용함을 가진다고 했지만, 그 정치적 기획이 가진 실제 의도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답변을 회피한다. 우리는 문명 패러다임이 ‘누구에게 유용한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책의 또 다른 집필 의도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미국 패권주의의 안정적인 유지’이다. 냉전의 종식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서방세계의 완승인 것 같지만, 이데올로기 갈등이 사라진 자리를 종교에 기초한 문명의 충돌이 대신할 것이라는 경고성 주장을 함으로써 헌팅턴은 서구의 핵심국인 미국의 낙관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질타한다. 다문명적 세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명이 유지되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서구적 정체성을 견지, 수호, 쇄신해야 하며 특히 미국이 서구 문명의 지도국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헌팅턴은 주장한다.
이렇듯 헌팅턴은 자신이 끼고 있는 렌즈가 한시적 수명을 가진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했으나 그 렌즈의 색깔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문명의 충돌’은 우리가 한시적 수명과 색깔을 가진 각각의 렌즈를 끼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성찰하게 하는 타산지석과 같은 책이다. 9.11 테러와 최근 폭력 사태의 원인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을 하기도 전에, 이 책의 내용과 개념을 이해하기도 전에, 헌팅턴의 주장에 대한 찬반 입장을 표명하기도 전에, 이미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이 정치시사용어가 되어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 색깔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