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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 라사 115(계명교양총서 115선)]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호기심이 동할만한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호기심은 놀라움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늦어도 4천 년 전에 기록되기 시작한 이 책 속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관심사가 다 들어 있다. 성과 사랑, 우정, 꿈, 모험, 죄와 벌, 죽음 등, 인류가 고민해 온 문제들이 다 망라되어 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이 책은 우르크의 왕 길가메쉬에 관한 이야기로 4단계의 성장 소설로 구조화할 수 있다. 발단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길가메쉬의 등장인데, 그는 독불장군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며 천하의 원성을 사는 나쁜 왕으로 나온다. 특히, 남의 신방을 침입하여 신랑 대신 신부와 잠을 자는(초야권)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러 급기야 신들은 길가메쉬를 제어할 전사를 만들어 보낸다. 이 전사는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괴력의 사나이 엔키두. 두 사람은 우르크가 떠나가도록 결투를 벌이지만 승부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이로서 소설의 전개부가 시작된다.


길가메쉬는 개과천선하고 엔키두와 협력하여 공적인 차원의 일을 많이 한다. 이들의 관심이 성과 사랑에서 우정으로 넘어가면서 가능한 일이다. 둘의 협력은 지상 최고의 괴물 훔바바를 처치하고 하늘황소마저 퇴치하는 인간 위엄의 절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이 신들의 심기를 건드려 엔키두는 벌을 받아 죽는다. 친구의 주검 앞에서 갑자기 죽음의 공포에 빠진 길가메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길을 떠난다. 바다 끝에 있다는 영생자 우트나피쉬팀을 만나 불사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함이다. 길가메쉬는 온갖 험난한 장벽을 넘어 마침내 우트나피쉬팀 앞에 선다. 영생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길가메쉬 서사시’의 절정을 이룬다.


우트나피쉬팀은 자신이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었는지 과거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대홍수 사건이 나온다. 이것이 창세기의 노아 홍수와 흡사하여 많은 학자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기독교와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우트나피쉬팀의 결론은, 영생은 더 이상 인간의 몫이 아니고 기껏해야 불로초 정도는 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불로초를 가지고 귀향하던 길가메쉬는 그것마저 뱀에게 도둑맞고 빈손으로 귀국한다. 길고 험난한 여정의 결산은 공수래공수거.


그런데 우르크로 귀국한 길가메쉬의 의식에 반전이 일어난다. 이 부분이 소설의 대단원인데, 길가메쉬에게 불현듯 조국의 성벽이며 신전이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는 감격에 젖어 같이 온 영생자의 사공(우르샤나비)에게 말한다. “성벽에 올라 한 번 거닐어보오. 그 토대를 살피고 석공술을 보시오. 정말 훌륭하지 않나요.” 왕위고 궁전이고 다 버리고 떠났던 길가메쉬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괄목상대한 것은 인간의 지혜와 땀이 이룩한 정신적·미학적 성취이다. 이것도 결국엔 유한한 것이지만 최소한 개인의 생물학적 유한성은 뛰어넘는 것이다. 길가메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글을 쓴다. 자신이 겪고 생각한 것을 라피스 라줄리(계명석이기도 한)에 적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는 것이다. 글쓰기, 개인의 물리적 유한성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가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인생은 힘겨운 여행이라는 것, 여기서 깨달음이 나오고 깨달은 뒤에야 가치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는 것. 진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부한 것은 진부하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 경향이 있고(헤겔), 인식되지 않은 것은 생명력이 없다. 진부를 인식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주는 신비가 바로 독서에 숨어있다. ‘길가메쉬 서사시’, 일단 독서가 우선이고 요약이나 해설은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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