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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불라 라사 115 (계명교양총서 115선) -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는 일본의 소설가이고 문예평론가이다. 그는 1968년에 타고르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대학시절에 기쿠치 칸에 주목을 받아 문인의 길로 들어선다. 졸업하고 잡지 ‘문예시대(1924)’를 창간해 서구의 전위문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감각의 문학을 지향한 신감각파 작가로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쇼와(1926-1989) 초기의 일본 문단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이 독점하고 있었다. 문학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항하여 문학을 예술로 받아들이자는 문학운동을 신감각파라고 불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현실 세계를 감각적이고 주관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새롭게 전위적으로 묘사하는 신감각파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그는 전 9편의 결정판 ‘설국’을 출판하기까지 약 13년을 가필과 수정 등을 통해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하였고, 일본에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안겨줬다.

‘설국’은 자연 배경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중심이며, 허무주의적인 시마무라, 순수하고 열정적인 고마코, 청순미의 결정체인 요코의 대립을 통해 삶과 인간 본성, 인간 행위의 즉시성과 찰나성, 자연의 무한함과 인간 행위의 유한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시마무라의 시점에서 묘사되는 모습들, 곧 근대화로 손상되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설국의 풍취, 아름답고 관능적인 고마코, 순수한 요코의 모습 등은 농밀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설국’의 주인공인 시마무라는, 설국의 게이샤 고마코에게는 삶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을,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요코로부터는 유키오만을 향한 지고지순한 애정을 느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현실로부터 떨어진 비현실의 세계, 순수한 미의 세계이다. 비현실 세계에서 헛수고를 하면서도 꿋꿋하게 사는 고마코의 모습을 통해 인간성의 순수함, 생명력을 묘사하고자 했다.

온천 마을을 배경으로 고마코, 요코와 주인공 간의 인간관계를 일본적 관점의 서정적인 표현으로 묘사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외로움을 견뎌야 했던 가와바타는 중학 시절, 화가가 되려던 꿈을 바꾸었다. 그가 전개한 신감각파 운동은 소박한 현실 묘사와 재현에만 머물러 있는 종래의 문학을 벗어나, 현실을 주관적으로 파악하여 지적으로 구성된 새로운 현실을 풍부한 감각의 세계로 창조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설국’에 적용했다고 흔히 본다.

‘설국’의 첫 두 문장은 세계 문학사에서 소설의 도입부 중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는다. “국경의 긴 터널 빠져나가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소설이지만 마치 한 편의 시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들이다. 또한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처럼 밤에 눈이 오는 모습을 주관적으로 파악하여 전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주장한 신감각파 운동을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일본어가 아닌 번역본으로 읽는 사람들은 이 문장 어디에 그렇게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해야 할 아름다움이 있는지 의아해한다. 이 두 문장에는 일본 특유의 리듬이 있는데 사실상 그걸 번역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자국의 정서가 깊이 배어있는 작품일수록 번역한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가장 일본적 정서가 배어있는 ‘설국’은 수없이 번역되었다.

‘설국’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니가타의 에치고유자와 온천이다. 군마현에서 긴 터널을 빠져나가면 니카타현이 나온다. 터널을 빠져나가기 전에는 눈이 전혀 없다가 터널을 빠져나가면 눈이 키 높이 정도로 쌓여 있다. 그야말로 설국이다. 따라서 니카타의 눈 고장은 현실과는 고립된 별세계와 같은 느낌이 든다. ‘설국’에는 유자와와 니카타라는 구체적인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지명을 뺐다고 한다. 그는 ‘작품의 구성상’에 대해 “지명은 작자 및 독자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지명을 뺐다고 한다. 이는 비현실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현실세계에서 비현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터널이라는 진입로가 필요했다. 설국은 비현실세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출현하는 설국은 시간을 초월한 유토피아적인 세계이다. 그곳에서 게이샤가 된 관능적인 고마코, 아름다운 눈과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청순한 요코, 두 여성의 상반된 매력을 느끼면서 사회의 생산 활동이 거의 없이 무위도식하는 시마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이다.

가와바타가 ‘설국’을 집필할 당시는 삶의 가치체계가 서양적인 것에서 동양적인 것으로의 이미지가 전환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근대일본이 서구 열강과 비견할 수 있는 강국이라는 인식과 함께 서구문명의 쇠퇴와 몰락을 예견하면서 일본이 새로운 20세기를 주도해가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는 서양문명과의 대립개념으로서의 동양문명으로의 회귀를 통한 동양에의 자각이라 할 수 있다. ‘설국’은 시마무라의 세 번에 걸친 고마코, 요코의 배후에 있는 전통과의 만남을 일상적 현실을 뛰어넘어 영원히 연결시켜 가도록 자연을 통해 전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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