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미국 밀워키. 21세의 윌리엄 할리는 자전거 공장 직공이었고, 20세의 아서 데이비슨은 철강회사 노동자였다. 이들은 틈이 나는 대로 허름한 창고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었다. 자전거를 보다 편하게 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두 청년은 ‘사이클’에다 ‘모터’를 달기로 했고, 4년 뒤 ‘할리데이비슨’이라는 이름의 공장이 차려졌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제품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꿈의 모터사이클로 남게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할리데이비슨을 젊음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한 편의 영화였다. 1969년 무렵의 혼란 속에 나온 영화 ‘이지라이더’에서 목적지 없는 청춘 피터 폰다, 데니스 호퍼, 잭 니콜슨의 불안한 방황의 끝을 지켜준 것은 할리데이비슨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그것은 마치 젊은 영혼의 동반자처럼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날렵한 이미지를 앞세운 혼다의 공세에 할리데이비슨은 크게 밀렸다. 거의 문을 닫을 뻔한 그들은 상품을 판다는 개념을 넘어 즐거움을 파는 문화 마케팅으로 눈을 돌렸다. 이동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아닌, 예술 작품이라는 의미를 모터사이클에 끌어들였다. 독수리 그림과 함께 자유, 개성같은 말을 동원했다. 독수리는 홀로 하늘을 날고
10,000번을 친 사람의 북소리와 10,001번을 친 사람의 북소리는 다르다고 한다. 연습이 완전함을 만든다는 경구를 되새기게 하는 무서운 말이다. 화가 앙리 마티스는 20세가 되기까지 예술의 ‘예’ 자도 모르는 법률학도였다. 22세때, 마티스는 돌연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 파리로 갔다.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그는 27세에 국립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살롱전에 그림 4점을 출품했다. 그리고 이후 심사위원이 없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면서 그의 작품은 서서히 그 진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생활은 어려웠다. “나는 어린 시절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서둘러라!’는 원칙에 따라, 일 속으로 곤두박질치듯 뛰어들었다. 나는 무언지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서둘러 일을 했다.” 마티스의 가장 큰 강점은 부지런함과 치밀함이었다. 강렬한 보색대비의 대담한 붓놀림으로 야수파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그의 명성은 높아갔다. 수집가와 후견인이 생겨 경제 사정은 나아졌지만 그는 잠시도 일을 놓지 않았다. 이 무렵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던 20대 청년 피카소가 마티스에게 접근했고, 12세 차이의 두 사람은 평생토록 동지와 비평가의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마
버지니아 울프를 읽은 사람도, 읽지 않은 사람도 그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이름이 주는 묘한 감성적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수를 담은 모습 때문일까? 영국 사람들은 그녀를 문학의 천재로 여기고 있다. 중력을 발견한 것과 같이 ‘의식의 흐름’이라는 문학적 양식을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라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25세 무렵부터 ‘블룸스버리’란 그룹에 참석해 토론을 벌였다. 초경험적인 것의 존재는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에서 미학적·철학적 주제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들은 진·선·미의 정확한 개념을 찾으려 했으며, ‘대상을 가리지 않는 불손한 태도’로 기존 관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등대로’, ‘델러웨이 부인’, ‘자기만의 방’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문학을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기분전환용 흥미거리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선구자적 페미니스트였다. “세상에서 주로 행사하고 있는 가치는 남성의 가치입니다.” 여성은 시나 소설 속에서는 정복자의 생애를 좌우하지만, 실제로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준 남자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특별하게 살고 싶었으며, 창조적이지 못한 삶을 미워했다. 그
브람스 시대에 브루크너라는 음악가도 있었다. 작곡도 하면서 피아노도 연주했던 두 사람은 평소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다. 어느 날 한 귀족이 브람스와 브루크너를 좋은 식당으로 초대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종업원이 메뉴를 가져오자 귀족이 먼저 주문을 했다. “나는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곁들인 고기 단자를 먹겠소.” 그러자 고급 식당이 낯설기만 한 브람스와 브루크너가 동시에 대답했다. “나도 그걸로 주세요.” 브람스와 브루크너는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묘한 침묵 끝에 귀족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입맛이 비슷한가 봅니다.” 그러자 브루크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공감하는 것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브람스도 비로소 미소를 지었고, 이후 두 사람은 예전처럼 시시콜콜 다투지는 않았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가장 완전하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친구도 애인도 아닌 자기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개성과 성격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항상 불협화음을 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염세주의자다운 말이지만, 서로가 같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인 듯하다. 지식인과 지성인은 아주 다른 존재다. 무엇에 대해 남보다 월
선정 20세기의 인물, 지 선정 최고 비즈니스 우먼, 지 선정 세계 10대 여성 1위, 지 선정 미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3위 그리고 세계 지도자상, 에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명사 1위로 선정, MC, 모델, 방송국 CEO로 선정된 여자. 이쯤하면 그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오프라 윈프리다. 미혼의 흑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자신 역시 미혼모였으며, 성폭행과 학대와 마약중독과 전과자의 세월들이 그녀의 청춘 속 이력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쟁쟁한 할리우드 스타들을 제치고 전세계 여성 갑부 1위에 올라 있다. 그녀는 산타바바라의 대저택에서부터 2억 원짜리 말과 자가용 비행기까지 소유하며 1조 원도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가 세계 최고 부자 대열에 서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하나는 지적 탐구요, 다른 하나는 친화력이다. 오프라 윈프리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독서였다. 소녀 시절, 그녀는 아버지 지갑에서 몰래 3달러를 빼내다가 들켰다. 아버지는 방황하는 딸에게 일주일에 책 한 권씩 읽을 것을 약속받고 용서했다. 그녀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인생에도 가능성이 있을지 모
흑인 인권 운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29년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때 마틴은 애틀란타에 있는 흑인 학교 모어하우스칼리지에 들어가 법학과 의학 중 어느 것을 전공할까 갈등하다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6세가 되던 해, 그는 보스턴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사목과 공부의 길을 가려고 작정하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세상 속으로 내몰았다. 12월 1일, 몽고메리 버스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흑인 여성 재봉사 로자 팍스가 버스 좌석에 앉아 있을 때, 운전기사는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를 거절했고, 곧 체포당했다. 흑백 분리에 관한 법을 어긴 죄였다. 법정에서 팍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분노한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벌이면서 ‘몽고메리개선협회’를 만들어 마틴 루터 킹을 회장의 자리에 앉혔다. 그는 가난하지 않았으며, 대학 교육까지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날밤, 킹은 흑인들 앞에서 연설을 해야 했다. “친구들이여, 우리가 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이라면 법원도 잘못입니다. 우리가 잘못이라면 하나님도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열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톰 행크스는 변호사로 나온다. 그는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뒤 처절한 가슴을 안고 움베르토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에 나오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를 듣는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팀 로빈스는 장기수로 나온다. 어느 날 그는 감옥 안에서 낡은 전축을 발견하고는 먼지 덮인 판 한 장을 꺼낸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저녁 산들바람이 부드럽게’가 온 감옥에 울려퍼진다. TV 오락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못생기고 초라한 중년 폴 포츠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다. 노래가 끝 날 무렵, 스튜디오 안은 감동의 도가니로 변한다. 얼마 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 그는 다시 그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오프라 윈프리는 객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탈리아어를 모르실 테지만, 소름 끼치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저녁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공주는 잠 못 이루고’ 같은 음악을 들으면 야릇한 감격에 빠진다. 오프라 윈프리의 말처럼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폴 포츠의 노래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TV를 시청했던 모든 세계인들을 소
목이 긴 사람들, 우수에 차 있는 듯한 표정, 그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 이쯤 말하면 그림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그것이 화가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를 가리키리라 짐작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린 시절 늑막염과 티푸스를 앓은 뒤 정규 교육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세가 되던 해, 그는 예술의 메카 파리로 갔다. 르네상스의 그림을 존경해 온 그는 세잔의 그림에 매료되었고, 거기에서 자코브같은 시인과 피카소같은 화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도덕적 관점에서 보자면 지극히 퇴폐적일 일상에서 모딜리아니는 빛나는 창조의 탑을 쌓아 갔다. 술과 연애가 뒤범벅이 되는 시간들, 그 속에서 그는 14세 연하인 18세의 소녀를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잔 에뷔테른, 모딜리아니는 그 때 32세였다. 모딜리아니도 나이답지 않은 모습과 반항기와 쓸쓸한 잔의 눈빛에 이끌렸다. 둘은 시내 한 건물의 옥탑방에서 뒹굴었다. 2년 동안. 시간이 흐르자 모딜리아니는 조금씩 예전처럼 술과 연애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난 잔은 흥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술가로서 불가피한 일이며 그보다 그의 그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더 바랐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의 몸
커다란 예술가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폴 고갱도 애초부터 그림으로 성장하지는 않았다. 17세가 된 1875년부터 6년 동안 화물선을 탔던 고갱은 23세 때 파리의 한 증권회사에 취직했다. 거기에서 미술품 소장가를 알게 되면서 그림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동료 직원과 화실에 다니며 습작을 하던 그는 28세 때 그린 ‘비로플레 풍경’이라는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고, 그것이 입선되고 만 것이었다. 고갱은 주로 휴일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1883년 증권회사가 망하면서 직장을 잃게 되자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제는 매일 그림을 그리자” 아내와 4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수입은 제로였다. 그로부터 1년 뒤 고갱은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으로 이사했으나, 처가 식구들은 직업도 없이 그림만 끼고 사는 그를 홀대했다. 결국 결혼 생활을 깨고 1885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예술을 위해 생을 바치기로 작정했다. 그 즈음 고갱은 두 가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하나는 5세 아래인 고흐라는 사내였고, 다른 하나는 마르티니크의 풍경이었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생각이 자신과 비슷한 열정적인 인물이었고, 여행지 마르티니크는 찬란하고 관능적인 원시의 색채였다. “원시미술은 자연을
마음이 돌멩이처럼 단단해질 때나, 칼끝처럼 날카로워질 때, 그것을 들으면 마치 푸른 하늘처럼 아늑해지는 음악이 있다. 나에게 있어 그런 것 중 하나가 구노(Gounod)의 ‘아베 마리아’다. 프랑스의 작곡가 구노는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예술적 환경에서 자란 그는 한때 성직자가 되려고 생각하기도 해서 사제들과 가까이 지내곤 했다. 그러나 그는 생루이 국립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작곡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 무렵 구노는 한 사제를 알게 되었다. 사제의 이름은 앵베르였다. 그는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신부로, 마카오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다 중국 쓰촨(四川)지구 부주교가 되어 있었다. 1837년, 구노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앵베르가 조선교구 주교로 임명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게시판에는 ‘○○○ 순교’라는 비보가 나붙곤 했던 터라 구노는 앵베르를 위해 기도했다. 중국 대륙을 건너 몽고에 머물고 있던 앵베르는 마침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와 있던 신부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직무를 수행했다. 숨어 다니며 선교하는 나날을 보내고
아무리 예술 쪽에 문외한이라도 빈센트 반 고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록 37세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그토록 위대한 창조자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개신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골 들판을 뛰어다니곤 했던 그는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호우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일을 거들며 미술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후 런던과 파리의 화랑에서 일하면서 예술적 감성을 일깨울 수 있었다. 고흐는 미술품을 놓고 장사를 하는 모습이 점점 싫어졌다. 23세 무렵 책방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던 고흐는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만다.그는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7세 무렵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먼저 데생과 수채화에 전념했다. 그리고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다른 화가들을 만나 회화 기법에 대한 지식을 넓혀 나갔다. 그림은 점점 대담해졌다. 그는 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