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편지’라는 이름으로 보내는 마지막 글입니다.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세 사람의 석공 이야기를 빌려 마음의 자세가 얼마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짚어보며 여러분께 작별을 고합니다. 돌을 깎고 있는 석공을 향해 다가간 한 행인이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질문을 받은 첫 번째 석공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지요. “보면 모르오? 아무리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돌 깎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뭘 하냐 묻는다니 어이가 없네” 힘든 일을 반복하느라 쌓여있던 불만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터뜨리는 석공, 그는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행인은 다시 두 번째 석공을 향해 다가서며 똑같은 질문을 하지요.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만약 여러분이 석공이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두 번째 석공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뭘 하다니요.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거지요. 일하지 않으면 누가 그저 먹여줘야 말이지” 화를 벌컥 내던 첫 번째에 비해 두 번째 석공은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는 목표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그건 목표가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책임 같은 것이지요.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라 렌토(La lenteur),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입니다. 밀란 쿤데라는 체코 출신 작가지만, 그의 대표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라 렌토’ 같은 책들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써서 유명해진 책들입니다. 이 책은 우리말로 ‘느림’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거기서 밀란 쿤데라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받는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증거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네가 똑똑하기 때문에, 또 네가 선물을 사주기 때문에, 네가 외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설거지를 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실망한다. 그런 사랑은 뭔가 이해관계에 의한 것이다. 그런 식의 사랑이 아닌 예컨대 이런 말들은 얼마나 듣기가 좋은가. ‘비록 네가 똑똑하지도, 정직하지도 않고, 비록 네가 거짓말쟁이고, 이기적이라도 난 널 너무나 사랑해”. 여러분은 소설에 나온 밀란 쿤데라의 글처럼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거나 또 사랑할 수 있습니까? 네가 좀 못 생겼어도, 네가 앞날이 그다지 창창하지 않아도, 네가 대학생이 아니라도, 네가 나보다 나이가 좀 많아도
인도 이야길 좀 할까요. 저는 인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3천년의 역사를 가진 옛 도시 바라나시입니다만, 광활한 대륙 인도를 가다가 만나는 석양의 아름다움 또한 빠트릴 순 없습니다.오늘은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에 있는 비토바 사원에 얽힌 이야길 좀 하지요. 비토바라는 명칭은 인도사람들이 神으로 숭상하는 크리슈나의 딴 이름이니 이 사원은 사실 크리슈나 사원입니다. 인도가 배출한 많은 聖子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슈나는 진지하고 심각한 성자가 아니라 춤추고 노래하고 웃기를 좋아했던 아주 낙천적인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비토바 사원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담긴 석상 하나가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 신이 된 크리슈나를 향해 그가 다시 한번 지상에 강림하길 열망하며 기도를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 소리에 감응한 크리슈나는 여인을 만날 마음을 먹고 강림하는데, 지상에 내려온 크리슈나가 막 여인의 등 뒤에 서는 순간 공교롭게도 여인은 임종을 앞둔 어머니의 발을 주무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내가 왔다. 여인이여 네가 열망하던 神 크리슈나를 보아라” 여인의 등 뒤에서 선 크리슈나가 그렇게 말했지만 어머니의
시라는 걸 쓰고 또 오랫동안 방송국 피디로 호구했던 나는 언어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는 편이다. 특히 FM방송에선 음악과 함께 중요한 것이 말인데, 지금처럼 외모 지상주의가 만연하기 이전의 라디오 방송은 말 잘하는 사람이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방송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세상엔 대략 6,000여개의 언어가 존재하고 있다는데, 컴퓨터나 미디어의 발달로 변형되고 왜곡되어 사라지는 언어는 더 늘어나고만 있을 것이다. 한 언어학자의 말에 의하면, 지금 지구상엔 단 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도 있다 하니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언어는 영원히 사라질 것 아닌가. 멸종되는 동식물처럼 언어의 세계에도 멸종이 있는 것이다. 컴퓨터를 보면 문자를 대신해서 ‘아이콘’이 나오는데, 아이콘(Icon)이란 말은 원래 히브리어로 ‘그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아이콘들을 보며 나는 인류가 선사시대로 되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상상할 때가 있다. 언어와 문자는 인간의 삶이 복잡하게 변하는 정도만큼 복잡해지는 것이니 단순하게 살았던 선사 시대의 인간에겐 그림이 좋은 표현 수단이었을 것이다. 거북이와 고래 같은 것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울산 반구대의 암
오늘은 禪에 대한 이야길 좀 할까요? 세상은 어수선하고, 한반도는 불안한데 무슨 놈의 도 닦는 타령이냐고요?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사실 도 닦는 일도 한 때의 창조지요. 일체유심조, 모든 게 마음의 장난이란 말입니다. 옛날 중국 이야깁니다. 그러니만큼 순전히 구라일 수도 있습니다. 임제선사의 스승인 황벽스님은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는 임제선사를 발견하고 다가가 주장자로 임제선사가 누워 있는 바닥을 두들겼지요. 지팡이 소리에 머리를 든 임제선사는 스승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한번 쳐들긴 했지만 이내 못 본 척 머리를 눕혀 다시 잠에 빠집니다. 잠든 임제스님을 내려다보던 황벽스님은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주장자로 바닥을 톡톡 건드리다간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던 황벽스님은 한 쪽에서 젊은 수좌 한 사람이 앉아서 참선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 수좌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 있는 저 친구는 참선을 하는데 자네는 왜 여기서 공상에나 빠져 있는가?” 잠자고 있는 임제선사를 보고는 참선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앉아서 참선하고 있는 사람에겐 공상에 빠져 있다니 이 무슨 되지도 않은 말인지요? “아니 스님, 잠자는 사람을 보고는 참
히말라야 속의 작은 왕국 부탄은 참으로 가난한 나라다. 고색창연한 불교사원만 이따금 보일 뿐, 돈 벌기 위한 산업 시설이라곤 눈 부릅뜨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 부탄 사람들의 삶을 궁핍하게 여긴다면 커다란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한 나라의 진정한 복지 지표는 국민총생산지수 GNP가 아니라 국민총행복지수인 GHP다’라는 말을 나는 그곳에 가서 들었다. GHP의 H는 해피, 행복이란 뜻인데, 그 곳 사람들의 미소 띤 표정들을 보면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이 최대 강대국이니 만큼 미국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추측하면 그것 또한 오류다. 몇 해 전 어느 국제기구의 조사에 의하면, ‘어느 나라가 가장 행복한지’ 행복지수를 측정한 결과, 놀랍게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방글라데시가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조사가 나온 적이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몇 십 달러밖에 되지 않는 나라, 가난하고 또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국민이라니 이게 과연 믿을 만한 조사일까? 그러나 방글라데시 뒤를 이어 행복지수 2
누구세요? 하고 물어 올 때 그대는 뭐라고 대답하는가? 생텍쥐베리 식으로 하면, ‘창틀에 제라늄을 키우고 있고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겠지만,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는 십중팔구, ‘저는 계명대학교 무슨 과, 몇 학년, 아무개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대는 아직도 그렇게 따분한 대답을 하고 있는가? 그런 따분한 대답을 가르치는 스승이 있다면 그 스승의 머리통을 쥐어박아 버려라. 몸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그대의 확신은 철석같은 믿음으로 스스로를 짝퉁 아닌 진품이라 여길 것이다. 몸짱이라는 평을 받으면 좋아하고, 몸꽝이라는 소릴 들으면 비관까지 해 가며 그대는 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데 길들어져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몸에 대해 타인이 내리는 판단에 따라 그대 마음이 태엽 감긴 인형처럼 좋았다가 싫었다가 춤을 춘다는 점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좋은 옷을 입고 있거나 장신구를 하고 있을 때 ‘그 옷 참 예쁘네’ 또는 ‘그 귀걸이 참 예쁘네’ 라는 칭찬을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몸뚱이에 달고 있는 장신구까지 마치 그것이 ‘자기’인양 착각하며 그대는
20년쯤 전, 대구의 한 방송국에 있을 때 ‘남의 말 좋게 하자’는 캠페인을 본 적이 있다. 요즘 인터넷에 올라오는 악성 댓글들이 떠오른다. 그 당시야 인터넷이 없었지만 얼마나 남에 대한 악플이 많았으면 캠페인 제목이 ‘남의 말 좋게 하자’였을까. 정신의학자인 융은 shadow라는 말로 인간의 그런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인간의 원형을 뜻하는 아키타입에 타인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감정, 즉 shadow, 그림자가 있다는 것인데 ‘남의 말 좋게 하자’는 바로 그런 그림자에 대한 각성이 담겨있는 캠페인이었던 것 같다. 햇빛에 나가면 인간은 모두 그림자를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감추고 싶은 약점처럼 빛 속에 노출되면 길게 꼬리를 드리운다. 겉으론 아무리 점잖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햇볕에 노출되면 그림자가 드러나듯, 닦여지지 않은 인간의 마음속엔 남이 잘 되기보다 잘못되기를 바라는 감정이 숨어있다.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라는 말은 바로 shadow를 나타내는 오래된 속담 아닌가. 20년 전 일이지만 그때의 그 캠페인은 지금도 유용한 캠페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그림자를 만드는 햇빛을 몽땅 없앨 수는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