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교양 글쓰기 교재로 [벨킨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5편의 재미있고 짧은 소설들마다 작가가 많은 의미를 부여해 놓았지만, 나는 두냐와 역참지기의 삶에 끌려‘역참지기’에 관해 쓰려 한다. ‘역참지기’는 두냐, 역참지기, 민스키 세 사람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두냐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두 남자와 탕아에 비유되는 두냐를 그린 작품이다.
소설‘역참지기’에서는 역참지기의 힘든 삶을 독자에게 부각 시키면서 그 일이 고될 뿐 아니라 그런 직업 때문에 딸을 잃은 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고선 단지 ‘역참지기가 불쌍하다.’ ‘두냐는 왜 아버지를 찾아뵙지 않았을까.’ ‘두냐는 정말 이기적이군.’단순히 이렇게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수업 중에 교수님께서 더 깊게 생각해 보고 미묘한 무언가를 발견해야한다고 말씀하셔서 더 주의하며 읽고, 더 깊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러자 소설 속 ‘무덤 앞에서 우는 두냐’ 그림의 두냐에게서 나도 모르게 연민이 느껴졌고 그녀가 내가 처음에 그랬듯이 단순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억울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무의식중에 같은 여자로서 그녀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생각을 다양하게 하려 노력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딸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 브이린의 입장, 두냐에게서 가정을 버리게 하고 그녀의 세속적 욕망과 사랑을 주고 행복을 채워주는 남자, 민스키의 입장. 자신의 타고난 아름다움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시골에서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두냐의 입장. 세 사람의 관점에서 서로를 비교하며, 소설을 곱씹어 보고, 그들의 심정도 느껴보려 노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려했다. 그러자 소설이 더 재미있게 느껴졌고 왜 푸쉬킨이 위대한 작가라고 하는 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우선 이 작품의 가장 문제가 되는 인물 두냐를 살펴보자. 하급관리인 역참지기의 빼어난 딸 두냐는 자신을 유혹한 잘생기고 돈 많고 유능한 경기병의 꼬임에 넘어가 자신의 행복을 누리면서 아버지를 살아생전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는 하급 관리인 아버지의 생활 속에서 늘 손님을 접대해야 했고, 역참지기의 힘든 직업 특성상 아버지를 도와야 했다. 게다가 어머니와 일찍 사별한 탓에 아버지를 어머니 대신 내조해야 했을 것이다. 브이린에겐 두냐가 큰 보물이었기에 어느 샌가 그녀는 아버지의 꼭두각시처럼 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10대다. 10대는 부모에게 강한 저항심이 생길 시기이며,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을 나이대고, 자신이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에 많이 힘들어 할 나이이다. 문제는 그런 두냐의 상황을 아버지인 역참지기가 ‘제대로 이해해주고 배려해 줬는가?’이다.
"영리하고 민첩한 것이 제 죽은 어미를 꼭 닮았습죠."란 말과 "살림도 얼마나 알뜰하게 잘 살았다고요! 청소하고 음식 만들고 하면서 무슨 일이든 척척 잘 했지요."란 말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역참지기 브이린이 단순하게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을 지닌 것일까. 게다가 민스키와 행복하게 살면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온갖 사치품을 몸에 걸쳐 비로소 제 아름다움을 발하는 두냐를 보고선 자신도 모르게 두냐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하지 않는가.
위의 대목에서 그에겐 두냐가 단순히 딸로서만 느껴지진 않았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남들에게 내세워도 전혀 손색이 없는 딸 두냐.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며 성난 야수 같던 남자들을 온순한 양으로 만드는 두냐의 능력은 아버지로서 자부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두냐가 브이린에겐 유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까다로운 여행객을 늘 상대해야하는 역참지기라는 직업을 가진 그에게 두냐는 딸을 넘어 보물이나 다름없다. 두냐 덕분에 자신의 고된 일을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인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가 아닌 ‘남자’로서 자신의 딸을 바라본 것 같다. 그리고 브이린은 아버지이긴 하지만 그녀의 출중한 외모와 능력을 뒷받침 해줄 능력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자신의 슬하에서 그녀를 가두려고만 했지 그녀가 살고 싶은 삶을 살게 해주려 한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역참지기는 딸 두냐의 행복과 자유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억압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드러나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평소 두냐를 대했을 때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딸 두냐.......그리고 일찍 사별한 자신의 아내의 모습을 닮은 두냐....... 역참지기에게 두냐는 단지 '사랑스러운 딸'의 존재였을까?
두냐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감탄을 금치 못하는 외모의 소유자다. 그뿐 아니라 영리하며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도 대화를 잘하는 재능을 이용해 자신의 고된 직업을 가진 아버지가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하급관리인 역참지기의 집엔 따로 하녀도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사별한 후 그녀는 오로지 혼자서 집안일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역참지기에게서 '알뜰한 살림꾼'의 칭호를 얻은 것을 보면 두냐는 공백의 어머니의 역할을 꽤나 잘 수행한 것 같다. 이미 부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브이린에게는 두냐가 내조를 잘하는 부인과 같은 존재가 되어 부인이 없어도 큰 문제는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두냐는 외모도 출중한데다가, 살림도 잘하고, 영리하며, 여행객의 비위를 잘 맞추고,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얻는데다 의사소통 능력도 좋다. 그녀는 역참지기 소설 속 시대에서는 최고의 여인상이었을 것이다.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나라 조선시대에서는 현모양처로 꼽혔을 것이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영락없는 팔방미인이다. 그런 두냐에게 아버지 브이린이 딸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집에 걸린 ‘돌아온 탕아’그림처럼 두냐가 민스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았을 것이라 짐작하고 너그럽게 받아주려 했던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모자랄 것 없는 부유한 집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받으면서 자신의 본래의 아름다움을 빛내며 정말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 두냐가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서 아버지라면 딸이 잘돼서 다행이다 느끼며 축복하고 행복하게 잘 살길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예뻐한 딸이 자신을 버렸다고 배신감을 느끼며 길거리에서 힘들게 살다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저주까지 한다.
브이린은 딸 두냐를 딸로서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능력이 출중한데다가 자신에게 행복을 준 두냐에게 남자로서 어느새 자신의 ‘소유물’로, 심하게는 ‘연인’으로 느끼며 집착까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겐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 두냐가 마치 자신의 행복을 짓밟은 것 같았을 것이고 그런 고통을 자신에게 준 두냐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을 것이다. 두냐가 떠난 뒤 술로 세월을 보내며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어느 실연한 남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아버지 브이린의 삶을 망쳐놓은 계기가 된, 역참지기 브이린에겐 너무나 교활한, 사랑하는 두냐를 좋은 말로 꼬신 민스키가 미울 수밖에 없다.
사실, 민스키는 누가 봐도 손가락질 할 정도의 일을 저지른 나쁜 인물이다. 민스키의 교활한 계략이 없었다면 두냐는 이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아버지 옆에서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기에 민스키가 어린 나이의 두냐를 감언이설로 잘 유혹해서 그녀를 홱 낚아챈 것은 누가 보아도 비난 받아 마땅할 행동이다.
하지만 민스키의 입장을 살펴보면 민스키가 무조건 비난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민스키는 아름다운 두냐에게 첫 눈에 반했기에,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을 것이고, 이틀 꾀병을 부리면서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두냐가 아버지 브이린이 그녀를 하녀 대하듯 대하는 것과 자신의 브이린의 꼭두각시처럼 억압받으며 살아온 그녀의 삶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빛내지 못하는 그녀의 삶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민스키는 두냐가 시골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지 못한 채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자신의 신분과 재력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성품에 반해서, 부당한 방식이긴해도 진흙 속 진주였던 그녀의 삶을 바꿔주었고,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에겐 두냐가 브이린의 예상처럼 며칠 갖고 놀다가 버리는 심심풀이 장난감이 아니었다. 민스키는 진정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에게 걸맞은 부와 지위와 명예를 주며 그녀를 행복하게 해준다. 게다가 그는 역참지기에게 한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많이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두냐를 보내줄 수 없기에 고뇌하다 그 감정을 애써 잊으려 한 것이다.
이제 두냐의 입장을 살펴보자. 민스키의 유혹에 넘어가 마차를 타고 갈 때 마부는 그녀가 계속 울었다 했다. 그녀는 이미 아버지의 곁을 떠나는 것이 잘못이라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말없이 몰래 떠나면 안 되는데.......' 망설였을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 없이는 아버지 홀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아버지가 자신을 애타게 찾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를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불효인가를. 그런 생각을 하며 두냐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했을 것이다. 10대인 그녀의 나이가 어리긴 해도 아버지를 배반하고 가는 길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버지의 가슴을 무너지게 할 것임을 알면서 민스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까? 민스키가 두냐에게 첫 눈에 반한 상태에서 따라오라고 협박과 폭력을 행사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럴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다. 그렇기에 두냐는 민스키에게 납치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과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다고 보인다.
게다가 어렸던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도 그저 비천하고 일이 고된 역참지기의 하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평상시 많은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녀가 자신의 삶에 대해 한 번 쯤은 좌절을 느꼈을 것이 당연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외모와 출중한 능력과 그녀에게 가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호감. 그런데 그런 그녀가 누려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시골의 역참지기의 딸로 남아 여행객의 비위를 맞춰야한다는 현실.......그랬기에 그녀는 그녀의 변변찮은 배경에 신물이 났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죽은 어미와 동일시 대하고 자신을 그저 알뜰한 살림꾼으로, 자신의 일에 도움을 주는 생계수단으로 여긴 아비에게 싫증을 느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14살쯤의 어린 나이, 그리고 '작은 요부'로 불렸을 정도의 미모, 자신의 외모를 활용해 성난 여행객에 대처하는 지혜로움. 어린 나이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도 얘기가 통하는 똑똑함. 하지만 10대인 그녀가 자신만을 생각할 시기에 그녀에게 찾아온 부귀와 명예 그리고 사랑이란 유혹은 그녀에게 너무나 벅찬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10대의 특성상 아버지의 행복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래서 두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그녀에겐 지루하고 따분했을 수도 있는, 그녀가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앞에서 갈팡질팡 했을 것이다. 스스로 떠난 것은 아니지만 민스키가 그녀와 함께 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그녀에게 그녀가 원하는 삶과 욕망을 계속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차를 타고 가면서 아버지께 느끼는 죄송함과 불효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많이 갈등했을 것이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에겐 많이 버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쩌면 그녀가 살아온 삶에 싫증을 느껴서 바라는 삶을 찾았기에 아버지를 그저 ‘한 때 사귀었던 옛 연인’으로 치부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죄송함도 잠시뿐,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삶에 만족해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괴로운 감정을 잊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충분히 찾아갈 수 있었음에도 살아생전 아버지를 찾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 소설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의 그림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한 요소일지 모른다. 탕아를 용서하려는 아버지와의 생각과는 반대로 행복하게 잘 살면서 오히려 아버지를 찾아뵙지도 않는 딸 두냐. 하지만 끝에선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것 같다. 아이를 셋까지 낳아 기르면서 자신이 부모의 입장이 되고 보니 진정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민스키를 제외한 총 식구를 거느리고 아버지를 찾아뵈려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녀와 개까지 대동해 찾아간 걸로 보아 민스키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같이 가지 않은 민스키의 상황을 추측해 보건대, 민스키가 어디로 출장 중이어서 몰래 온 것이거나, 아니면 민스키는 브이린에게 죄송함을 느끼고 혼자만 찾지 않았을 수 도 있다. 어쨌든 ‘돌아온 탕아’ 두냐의 이야기는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감싼다는 성경의 내용과는 다르게, 슬픈 결말로 끝난다.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와 용서를 구하기엔 너무도 시간이 늦어버렸지만 그녀는 평생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살 것이다.
이렇게 독후감을 쓰면서 자세하게 인물들을 파헤치다 보니 나는 두냐처럼 내 행복만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에게 아픔을 주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를 옭아매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모님이라도 다 나를 사랑하기에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푸쉬킨이란 작가를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푸쉬킨이란 위대한 작가는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나처럼 현대인에게 교훈을 주기에 그 이름을 떨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보통 소설의 줄거리처럼 두냐가 민스키에게 버림받는다던지, 두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 해피엔딩으로 마감한다든지 하는 흔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남들과는 다른 발상으로 큰 의미를 준다는 것에 아마 푸쉬킨이 천재 작가로 불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세 사람의 엇갈린 관계. 개개인의 욕망으로 인해 생긴 비극이지만 단순히 넘길 만한 새드엔딩이 아닌 것 같다. 사랑과 집착 그 사이에서 아버지와 딸의 삶이 달라진 것처럼 내가 결혼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구속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