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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계명의 현장

제10회 교양도서 독후감 경시대회 최우수작

'유토피아'를 읽고

제10회 교양도서 독후감 경시대회 최우수작

『유토피아』를 읽고 부제 :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하여

나는 SF를 좋아한다. SF는 Science Fiction을 줄인 말로 과학적 공상에 의거한 허구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과학적 공상과 상상을 즐기는 편이라 SF 영화도 즐겨보는 편인데 이번에 교양세미나 교재 중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몇 년 전에 보았던 <이퀼리브리엄>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 감정이 철저히 통제되고 인간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문화적 행위들이 사회질서를 해치는 악으로 규정되는 사회를 보면서 당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에서 표현된 이상향이 「유토피아」를 읽고 난 후 내가 꿈꾼 이상향과 일부분이나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상향은 두 번에 걸쳐서 변했다. 어렸을 때 첫 번째 이상향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제한 없이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절대적 풍요’라는 긍정적 개념을 도출할 수 있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경제관념을 전혀 고려해보지 않은 이상향이었다. 두 번째 이상향은 만화영화에나 나올만한 세계평화였다. 후에 전쟁이 없어도 이 세상은 늘 전쟁 중이라고 치부할 만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비교적 오래 염원했던 이상향이었다. 군에 있을 때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는데, 만약 세상에 전쟁이 없다면 군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로 전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지금은 우스울 지도 몰라도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세계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의 이 철없는 두 가지 이상향의 모델만 보더라도 「유토피아」를 읽기 전 이상향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신중하지 못했는지 드러난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토마스 모어의 작품을 뛰어넘어 ‘이상향’을 일컫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지만 사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인류의 염원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었다.「유토피아」가 직접 영향을 받았던, 철인 통치를 주장했던 플라톤의 「국가」를 시작으로 강력한 군주 정치를 표방했던 캄파넬라의「태양의 도시」, 최첨단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 그리고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며」에서 나왔던 국가 주도의 이상사회 등 인류의 역사를 통해 많은 이상향이 제시된 바 있다. 세계의 종말이 오는 날 예수가 재림하여 이루게 되는 기독교의 ‘천년왕국’ 역시 유토피아에 대한 또 다른 비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의 ‘에코토피아’에 이르기까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1516년에 발표된 이후 유토피아 사상의 원형이 되어 여러 영역에 걸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서양에만 이러한 이상향이 존재해왔던 것은 아니다. 동양의 경우에도 무위자연의 세계를 추구해왔던 ‘무하유향’과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된‘무릉도원’, 불로불사의 땅 ‘샹그릴라’, 그리고 널리 알려진 「홍길동전」의 ‘율도국’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이상향의 모델은 서양의 그것과 비교하여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동서양을 통틀어 발표되지 않고 사장되어버린 이샹향의 모델들 역시 수없이 존재했을 것이라 추측해 볼 때,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갈망, 즉 이상향을 향한 꿈은 계속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범람하는 다양한 이상향 속에서 토마스 모어의「유토피아」의 의미는 그 이상향의 모델에 있다기보다 그 비판성에 있다. 그의 이상향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었던 당시 사회현실에서 새로운 비판을 요구했다. 그것은 매우 신선했으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연상하게 하는 나의 첫 번째 이상향과 ‘평등’이라는 개념에서 닮았다.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단지 공동으로 생산한 제품들을 동등하게 분배해서 사용하며 생활에 모자람 없이 지내고 있다. 절대적 풍요와 절대적 빈곤이 극단적 평등이라고 보았을 때 「유토피아」는 그 중간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두 번째 이상향과는 다르게 「유토피아」는 그다지 평화롭지가 않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이상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비유토피아 주민들이 존재하는 곳 가운데 던져놓았다.「유토피아」주민들은 전쟁을 아주 싫어하지만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모아두었던 귀금속으로 적을 매수하거나 용병을 고용하여 대리전을 치르게 한다. 여기서 유토피아인들의 사고방식에는 그들이 주변 국가들의 민족들보다 우월하다는 선민사상이 저변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완벽한 톱니바퀴처럼 조직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맞물려 가는「유토피아」에서 전쟁으로 잃게 될 수 있는 자국민을 철저하게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보이지만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용병인 짜폴레타에인들의 희생에 대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의 당연한 죽음’으로 인식하는 부분에서 인간의 존엄에도 차별을 두는 그들만의 해석방식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이율배반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수긍이 가지 않는 또 한 가지는 바로 노예제도의 존재였다. 「유토피아」에서의 노예들은 끊임없이 일을 하며 가혹하게 다루어진다. 소수의 선택받은 주민들만이 이상향에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관념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노예제도를 택했다는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노예제도를 「유토피아」주민들의 나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측되었다.

법학 학부생으로서 특이하게 생각했던 점은 유토피아의 법률이 아주 간단하고 평이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법률사무를 대리하는 변호사가 존재하지 않고 주민들은 대부분 법률전문가로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들 스스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토마스 모어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한 법률체계로 사람들을 얽매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의 법은 성문법 체계로 그 양이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여 일반인들의 이해가 어렵다. 물론 「유토피아」와 현대사회를 비교해볼 때 사회의 복잡성에서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사회가 더욱 더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현실에서 법조항은 더욱 더 양적으로 팽창하고 복잡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몇 해 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법률용어를 쉬운 용어들로 바꾸어 법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려고 한 시도가 결국 흐지부지하게 되어 실행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볼 때, 간소화된 유토피아의 법률은 우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의 실현의 도구로서 법이 존재하는 만큼 이 도구의 사용설명서는 한 눈에 알아보아야 되지 않을까 한다. 이는 우리나라 법조인들에게 남겨진 과제라 본다.

「유토피아」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회주의 사상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후에 마르크스 사회주의자들의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들의 비판은 모어의 유토피아가 과학적인 시각에 바탕을 두지 않고 공상적 이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상향을 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유토피아」를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이 나왔다고 본다. 즉 모어의「유토피아」는 중세에서 근세의 사회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부되는 사회 모순에 대한 반성으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토마스 모어의「유토피아」는 읽기 전 내가 꿈꾼 완벽한 이상향은 아니었다. 마치 이상과 현실이 혼합되어 있는 수프와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책을 완독한 후 나만의 이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문명이 매우 발달된 총 3개의 도시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로지 사람들의 식량생산만 맡는 제 1도시, 그리고 각종 생활용품이나 생활의 편리함을 위한 산업, 발전, 서비스업 등 광대한 영역을 맡은 제 2도시가 있고, 이 가운데에 각종 행정, 사무, 정치, 법률을 담당하는 제 3도시가 존재한다. 각각의 도시는 세분화된 작은 도시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렇게 3계층으로 이루어진 도시연합체들은 동일한 규모로 전 세계에 걸쳐서 존재하며 각 도시 연합체가 가지고 있는 부의 균형은 동등하기 때문에 다른 곳을 침범하는 행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도시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으며 ‘유비쿼터스’가 말 그대로 완벽하게 실현될 정도로 문명의 수준은 상당히 발전되어 있다. 효율적인 분업을 위하여 도시를 따로 구별했을 뿐 사실상 광속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 도시간의 체감거리는 사실상 제로(0)에 가깝다. 세 도시에서 일하면서 받는 급여는 모두 동일하다.

내가 꿈꾸는 이상향에서는 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일을 하게 되어 받게 되는 급여는 권리 형태로 주어질 뿐이다. 권리형태로 주어진다고 해서 제 1도시에 일하는 농부나 제 3도시에서 일하는 의사가 받게 되는 권리가 서로 다른 것은 아니며, 이러한 권리들은 축적하거나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 세 개의 도시그룹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자급자족을 완벽하게 실현하기 때문에 다른 곳과의 무역이 전혀 필요 없으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모든 필요한 물자는 전혀 모자람도 없고 부족함도 없이 생산된다. 일을 하지 않는 자는 권리를 받지 못하게 되고 결국 살아가는데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이 세계는‘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원칙이 확실하게 지켜지는 세계이다. 모든 곳에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지만 정말 필요한 곳이 아니면 로봇의 활용은 제한된다. 지나친 로봇의 활용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결국 나태함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언제든 할당량을 채우게 되면 여가생활을 누릴 수 있다. 할당량 이상의 일을 하는 것도 가능한데 여기에 대한 보상은 또 다른 권리의 형태로 주어진다. 공산주의와 같은 완전한 부의 배분은 일의 능률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추가노동에 대한 혜택을 주는 것이다. 이는 다른 주민들에게 자극이 되고 좋은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

나의 유토피아 주민들은 미국의 유명 외화시리즈인 <스타트렉>의 발칸종족처럼 감정을 매우 잘 제어 할 수 있는 지극히 합리적인 인간이다. 내가 꿈꾸는 주민들은 불안정한 감정이 유발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의 폐해에 대해서 인지하고는 있지만 감정 그 자체를 없애야 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이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와 어느 정도 근접해 있다고 느낀 것은 나 역시 그 영화의 기저를 이루는 생각, 즉 인간의 감정을 통제함으로써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볼 때 모든 전쟁은 감정 때문에 발발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한 이성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그 영화의 이상이 처음부터 얼마나 잘못 꿰어진 단추와 같은지 일깨우고 영화의 결말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잘 통제할 수 있는 과학기술적인 장치는 여전히 내게 매력적으로 남아 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르크스가 주창한 사회주의라 불리는 과학적 유토피아의 사상적 근원이 된다. 90년대의 사회주의의 몰락은 존재할리 없는 곳을 현실에 적용하다 일어난 필연의 결과이지 않을까? 인류는 이처럼 수천 년간 더 나은 이상향을 지향해 왔고 현재도 지향해가고 있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제자백가와 같은 많은 사상의 출현도 아마 그 거대한 흐름의 한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마음속에는 각기 자신만의 유토피아가 존재하기에 인류 전체를 위한 하나의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신기루를 추구해가면서 더 나은 꿈을 꾸며,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유토피아를 추구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유토피아란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과정 중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그 과정 중에 실현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미래에 대해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사회라면, 이미 유토피아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토마스 모어가 현시대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상향을 보다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유토피아」라는 SF영화를 혹시 만들지 않았을까 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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