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류동엔 천산 만산 온통 다 짙푸르고
둘러싼 벼랑, 벼랑 옥 병풍을 깎았는데,
고금의 나그네가 제 이름을 새긴 것이
팔만대장경보다도 오히려 더 많을 지경.
紅流洞裏萬山靑(홍류동리만산청)
四壁周遭削玉屛(사벽주조삭옥병)
今古游人題姓字(금고유인제성자)
多於八萬大藏經(다어팔만대장경)
내 나이 아직 스물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 조선팔경의 하나라는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갔다가 하마터면 뒤로 넘어 갈 뻔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절경다운 절경을 전혀 구경하지 못했던 나에게 홍류동 일대의 빼어난 산수부터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바위, 바위들이 바위를 이고 있는, 그 무수한 바위들마다 수두룩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그 엄청난 이름들 앞에서도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이 시를 지은 조선후기의 시인 이건창(李建昌:1852-1898)도 나와 꼭 같은 경험을 나보다 백년쯤 먼저 했던 모양이다. 그는 말한다. ‘홍류동의 산들은 온통 짙푸르고, 홍류동 벼랑들은 옥으로 깎아놓은 병풍처럼 아름답다’고. 그는 또 말한다. ‘그 옥 같은 병풍에 덕지덕지 새겨진 이름들이 팔만대장경의 글자 수보다도 더 많다’고. 시인은 이 시를 ‘장난삼아 지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장난삼아 지은 시가 아니다. 말 속에 뼈가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최치원이, 만약 이황이나 이이가, 만약 박지원이 새겼다면 지금쯤 문화재가 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 큰 분들이 이런 따위의 거지같은 짓거리를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연암집’에 나오는 김홍연 같은 사람들이다. 그는 양쪽 옆구리에다 기생을 하나씩 끼고서도 몇 길 담장을 훌쩍 뛰어 넘었다는 역사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영원토록 남겨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송곳과 끌을 들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전국 명산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제 이름을 새겼다. 세상에 김홍연 같은 이가 어찌 하나나 둘 뿐이겠는가. 그들이 석수장이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명승지마다 여기저기 마구 새겨대는 바람에, 금수강산이 ‘백결선생’이 되고 만 것이다.
1558년 초여름. 지리산을 유람하다가 바위 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발견한 남명 조식이 이렇게 한 말씀 점잖게 하셨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흰 해와 같아서 역사가가 역사책에 새기게 해야 하고, 이 넓은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다 새겨야 하거늘, 허허 그것 참, 이거야 나 원”. 바위를 바위로 삼지 말고 역사책과 사람들의 입을 바위로 삼아 거기에다 이름을 새기는 아주 큰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최치원처럼, 이황이나 이이처럼, 박지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