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李珥)가 지은 손바닥 만 한 시다. 작품 속의 사내는 깊고도 깊은 산 속에서 정신없이 약을 캐고 있다가 홀연 길을 잃고 말았다. 여기가 어딜까 하고, 문득 사방을 둘러본다. 온 동내 된장 고추장을 모두 다 퍼 와서 완전 뒤범벅 해 처바른 듯이 천산 만산의 단풍들이 아예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다.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첩첩산중이다. 풍경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바로 그 때, 산속에서 살고 있는 승려 한 분이 물을 길어 어디론가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어디 가까운데 절이 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저쪽 수풀 끝에서 보글보글 차 끓이는 연기가 솔솔 피어나기 시작한다. 눈물이 핑 돌도록 푸른 하늘에 하얗게 솔솔 피어나는 연기. 순도 100%의 절대적인 적막 속에서 아연 가벼운 생기가 돈다.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눈앞에 그림이 다 그려진다. 고작 스무 자에 불과한 시에 한 두 폭도 아니고 네 폭 병풍이 하나씩 차례대로 펼쳐지는 그림!
“호수 가 숲 아래 작은 집/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기가 없다면/ 집과 숲과 호수가/ 얼마나 삭막할까”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의 [연기]라는 작품이다. 만약 그 때 수풀 끝에서 차 끓이는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다면, 산들은 얼마나 심심했을까. 물을 길어 돌아가는 승려가 없었다면, 약을 캐러왔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내가 없었다면, 산은 또 혼자서 얼마나 심심하게 야위어 갔을까. 된장 고추장을 뒤범벅 해 처바른 저 활활 타오르는 미친 산이 없었다면, 산 아닌 것들은 또 얼마나 심심하게 가을을 보냈을까.
올해는 나도 첩첩 가을 산에 약을 캐러 갔다가,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고 싶네. 활활 타오르는 단풍나무 아래서, 차 끓일 물을 길어 돌아가고 있는 승려를 문득 만나고 싶어지네. 설설 따라가서 오래 오래도록 차를 얻어 마시며, 긴긴 담소를 나누고 싶네. 절 마당 천지간에 막무가내 휘날리는 나뭇잎들과 천 근 만 근 밀려오는 저 저녁놀을 젖 먹은 힘을 다해 절 밖으로 쓸어내고, 산 속에서 하룻밤 푹 자고 왔으면 더욱더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