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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신문

[125주년 특집 역사 돌아보기] 선교사로부터 시작된 125주년

계명대 설립에 공헌한 선교사 3인 - 안의와, 장인차,안두화

● 들어가기

2024년 올해는 계명대학교 창립 125주년이 되는 해다. 계명대학교가 창립 125주년이라 하는 것은 현 계명대 동산의료원의 전신인 대구 제중원(濟衆院)이 1899년 개원한 것에 연유한 것이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계명대는 1954년에 개교하였으므로 올해가 개교 70주년이 된다.

19세기 말 대구, 경북지역에서 기독교 3대 사역, 즉 말씀 전파와 치유(治癒), 교육사역을 위해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던 대구, 경북 기독교 선교의 선구자 안의와(安義窩, 1867~1920) 목사는 1987년 11월 대구선교부 사랑채에서 남문안교회(현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하고 1899년 12월 대구선교부 내 하인들이 사용했던 초가집에서 치유사역을 위해 의사인 장인차(張仁車, 1869~1951) 의료선교사와 함께 대구 제중원을 설립, 개원했다.

안의와 목사는 또 대구선교부 내 초가 행랑채에 1900, 1902년 남녀 초등학교, 1906, 1907년 남녀 중등학교를 설립, 개교했고 1912년경 대구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으나 당시는 일제 강점기인데다 건강 악화 등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4년 대구에 온 지 23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30년 후 그의 장남 안두화(安斗華, 1895~1965) 목사가 아버지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1954년 계명기독대학을 설립, 개교했다.

이렇게 설립된 계명대학은 1978년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지금의 성서캠퍼스를 조성하면서 대구동산병원을 통합하여 오늘의 글로벌 계명대학교로 장족의 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 대구, 경북 근대화의 선구자 안의와 목사

안의와 목사는 1867년 미국 인디애나주 맥코이(Mecoy)에서 태어나 시카코 맥코믹신학교(1894)를 졸업하고 미국 예수교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아 1895년 5월 한국 부산항에 도착했다.

1896년 11월 대구선교부를 자형인 배위량(裵偉良, Rev. Dr. William M. Baird, 1862~ 1931, 숭실대학교 설립자) 선교사로부터 인계받은 안의와 목사는 1897년 11월 대구로 와서 지금의 대구 약전골목 안의 대구선교부 사랑채에 대구, 경북 최초의 개신교회인 남문안교회(대구제일교회)를 설립했고 목사인 본인이 직접 할 수 없는 치유사역을 위해 장인차 의료선교사를 초청, 대구선교부 내 초가에 미국약방과 대구 제중원을 1899년 개원하여 근현대 의료시설이 전혀 없었던 대구, 경북에 획기적인 의료봉사를 펼치기 시작했다. 약전골목 안 대구선교부의 제중원이 당시 급증하는 환자와 냄새, 연기, 소음 등으로 도저히 병원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안의와 목사는 1903년 선교기지 자체를 지금의 계명대학교 동산캠퍼스로 옮겼다. 

또 안의와 목사는 1900년, 1902년 남녀 소학교인 대남소학교,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 개교하였고 이어서 1906년 계성중·고등학교(Boy’s Academy)와 1907년 성명여자중학교, 신명고등학교(Girl’s Academy)를 1907년 개교하였다. 이들 학교에 졸업생이 배출되는 1912년경 대구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으나, 일제 강점기인 당시 사정과 상대적으로 좁은 나라에 이미 평양과 서울에 기독교 대학이 있다는 이유로 미국 해외선교부에서 대학설립을 허락하지 않았고 본인의 건강 악화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1924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안의와 목사의 대구, 경북발전에 대한 큰 업적을 기리며 지금 우리는 대구, 경북 근대화의 선구자 안의와 목사를 ‘대구, 경북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 대구 제중원 초대 원장 장인차 의료선교사

장인차 의료선교사는 1869년 미국 일리노이주 게일즈버그(Galesberg)에서 태어나 1895년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예수교 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1897년 12월 대구에 도착했다. 2년여 동안 제중원 개원을 준비해 온 장인차 선교사는 1899년 7월 주문한 의약품이 도착하자 우선 대구선교부 내에서 미국약방을 개설했고 의료시설이 갖추어지자 그해 12월에 대구선교부 내 초가에 대구 제중원을 개원했다. 지금의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의 전신인 이 제중원이란 이름은 고종황제가 1885년 4월 ‘대중을 구제하는 집’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근현대 의료의 불모지였던 구한말 대구, 경북에 이 제중원이 개원되자 환자들이 연일 물밀듯 찾아와서 격무로 장인차 원장은 건강 유지가 어려웠다. 1901년 그는 결국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안식년으로 미국에서 1년간 쉬었다. 1903년 대구로 돌아와 동산캠퍼스에 제중원을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어 이전하자 환자 수가 5천여 명으로 해마다 급증했다. 1909년 나환자보호소를 설립하여 나환자까지 돌보게 되자 장인차 원장은 병이 재발하여 마침내 1910년 원장직을 사임하고 1912년 11월 15일 미국으로 영구히 돌아갔다.

 

 


● 계명대학교 설립의 주역 안두화 목사

안두화 목사는 1895년 2월 미국 캔자스주 토피카에서 안의와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출생 3개월 만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왔다. 1921년 시카고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안두화 목사는 아버지 안의와 목사의 건강 악화로 1925년 황해도 재령에서 대구로 선교지를 옮겨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6.25 한국전쟁이 3년 만에 끝나자 안두화 목사는 아버지 안의와 목사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계명기독대학 설립을 시작했다. 그 첫 모임이 1953년 6월 11일 11시 당시 계성학교 신태식 교장실에서 개최되었고 ‘계명대 설립을 위한 기성회준비위원회’는 그 후 8차례 모임을 갖고 재단설립과 이사 선임을 결정하고 1954년 4월 개교하기로 하고 해산했다.

재단 이사장은 안두화 목사가 맡고 설립자는 안두화, 최재화, 강인구 세 사람으로 하고 이사는 안두화, 최재화, 강인구, 신후식, 김광수, 감부열 등 16명으로, 초대 학장은 감부열 목사를 임명했다. 1954년 4월 계명기독학관이란 이름으로 개교한 계명대학교는 지금의 대구 중구 대신동 계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안두화 목사 사택과 신학교 강의실 등을 빌려 개관했다.

1955년 2월 5일 재단법인 계명기독대학 설립을 문교부로부터 허가받은 계명대학교는 1955년 2월 8일 지금의 계명대학교 대명캠퍼스를 조성, 이전하여 1956년 2월 18일로 공식적인 4년제 대학으로 허가받아 본격적인 역사의 장을 펼쳤다.

 

 


 

● 마무리

지금의 계명대 동산의료원의 설립자는 안의와 목사와 장인차 의료선교사였고 대학으로서의 계명대 설립의 주체자는 안의와 목사 장남 안두화 목사였다. 1954년 계명대 설립 당시 행정관련 업무를 책임지고 맡아서 처리하고 대학을 교회정치로부터 독립시켜 건강한 대학으로 성장, 발전시킨 공로자는 교육행정 전문가인 동산(童山) 신태식(申泰植, 1909~2004) 박사였다. 특히 신태식 제3대 학장은 국내외 대학발전기금 모금운동으로 계명대를 아주 건강하고 알찬대학으로 발전시킨 계명의 청지기이다.

그 후 계명대는 1978년 사립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치유기관인 동산기독병원을 통합하여 의과대를 설치했고 간호대, 약학대를 신설하여 치유와 교육의 온전한 체계를 완비함으로 실질적인 글로벌대학으로 그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오늘의 계명대 발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지금의 메인 캠퍼스인 성서캠퍼스를 조성하고 120년 역사의 동산기독병원을 통합, 2019년 4월 성서캠퍼스에 새병원(동산병원)을 이전, 개원함으로 계명대 발전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활짝 펼친 주인공은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오늘까지 남다른 안목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계명대를 지키고 이끌어온 행소 신일희 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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