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0의 얼굴, 1000냥 빚, 성경에는 솔로몬이 기브온에 있는 큰 사당에서 제사를 드릴 때 번제물을 1000마리나 바친 적이 있다고 열왕기상에는 기록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1000마리 학을 접어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분명 1000이란 숫자는 의미 있는 숫자임에 틀림없다.
1957년 계대학보란 이름으로 신문을 첫 발행한 후, 지금까지 1000호를 발행하면서 계명인의 대변자로서 올바른 계명문화 창달과 대학홍보의 전령사 역할을 한 계명대 신문이여 영원하리라.
집 앞 텃밭에서 가을배추를 심다가 기자로부터 지령 1000호 발행에 즈음하여 축하의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배님 계명대학교 신문사 기자인데요” 졸업한지 30여 년 만에 모교인 친정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친근감이 가는 “계명대학교”
연락을 받고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대학 1학년 때쯤 잠시 계대학보의 만화를 몇 장 그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던 밭일을 계속하며 30여 년전 대학생활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의 윌슨관이 되어버린 당시 예술관에서 밤늦도록 그림을 그리던 일, 시험 때면 도서관에서 시험공부하며 밤을 새우던 일, 5월 개교기념축제 때면 대명노천강당에 둘러앉아 서울에서 내려온 통기타 가수들과 함께 “가방을 둘러맨 어깨가 아름다워...” “저별은 나의 별 저별은 너의 별....”을 부르며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며 하나가 된 계명인들. 운동화를 꺾어 신고 다니다 발걸음이 엄청 빠르신, 당시 종합대학 초대총장이셨던 신일희 현 총장님께 꾸중을 듣던 일. 무엇보다 지금 내 곁에서 함께 잠드는 아내와 밤늦게까지 사랑을 속삭이며 캠퍼스생활을 즐기던 일. 이 모든 과거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계명대학교는 30년 전의 계명대학교가 아니다.대명캠퍼스 시대를 마감하고 성서캠퍼스의 시대가 온 것이다.
멀리 마산에서 모교의 소식을 가끔 듣고 있긴 하지만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대학에서 교수채용 시 계명대 출신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정말 계명대가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는 일류대학으로 성장한 것을 실감하며, 후배교수들을 내 형제이상으로 기쁘게 맞아준 적이 있었다. 흔히들 국적은 바꿀 수 있지만 교적은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이 시각 난 계명인임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학이 세계적인 대학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대학신문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신문의 역할은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좌로나 우,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기다려지는 신문, 읽혀지는 신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지령 1000호를 맞아 계명대학보사 관계자 여러분께 계명인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학보사와 모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