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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문학상 작품보기

제 29회 계명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김수진(경희대 국어국문학·1)

  • 작성자 : 계명대신문사
  • 작성일 : 2009-05-25 03:25:24

 

김수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학년)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의 꽃잎이 아직 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괜찮다.

 

  단발머리 가발을 씌운 사라를 의자 위에 내려놓는다. 머리통에서 쇄골까지 오는 부분만 덩그러니 남은 사라는 나와 눈높이를 마주한 채 초점 없는 눈을 멀뚱히 뜨고 있다. 가위를 집어 들고 은색 양날을 벌린다. 날의 끝이 송곳니처럼 번뜩인다. 양날이 벌어졌다 오므라들길 반복하는 동안 잘게 토막 난 머리카락이 의자 위에 깔린 신문지로 떨어진다. 사람의 턱은 위턱과 아래턱이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약해진다지만 가위는 반대로 유연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얻는다. 은색 날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며 머리카락의 깊은 심연 속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손바닥에 와 닿는 사라의 딱딱한 머리가 내 머리처럼 느껴진다. 할 수만 있다면 날카로운 날 끝으로  두피를 가르고 이 안에 실타래처럼 뒤엉켜있을 기억 덩어리를 잘라내고 싶다. 사용해 줄 사람을 잃었을 때 녹이 스는 건 사람과 가위 모두 마찬가지다. 다만, 사람이 녹스는 속도가 조금 더 빠르다. 가위를 쥔 손끝이 저릿하게 아프다.


  토할 것 같아.
  등 뒤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가위를 의자 위에 내려놓고 구부정했던 몸을 일으킨다. 속이 메스꺼워. 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베란다에 내어 놓았다 잊어버린 화분처럼 목소리의 끝이 바싹 건조되어 있다. 말라붙은 건 목소리만이 아니다. 너는 사라세니아의 포충망에 걸려든 벌레처럼 생기를 잃었다. 너의 눈동자 속에 어른거리는 어둡고 푸른 기운이 나는 두렵다. 옷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며 거실로 나온다. 거실 벽에 직사각형 액자에 담긴 K의 그림이 걸려 있다. 네덜란드에서 사왔다는 색이 짙고 뻑뻑한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K는 떠났고 K의 그림은 이 집에 남았다. 언젠가 일을 그만두게 될 때 내 새로운 가위가 되어줄 사람이라 믿었던 K는 떠났고 붉은 색으로 채워진 기묘한 그림 하나는 이곳에 남았다. 단단하고 아름다웠던 것은 떠났고 그것의 조각 조각난 파편은 남았다. 그 파편의 삐죽한 모서리가 그림을 바라볼 때마다 내 눈을 아프게 찔러온다. 막 태어난 새끼 거미들이 제 몸을 먹어치우는 걸 보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어미 거미처럼 내 몸을 가시처럼 깊게 파고들어오는 이 그림을 난 끝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젤에 화폭을 놓고 그림을 그리던 K의 뒷모습이 눈앞에 일렁인다. 붓을 쥘 때마다 가위를 들고 있을 나를 생각한다고 했던 K. 나와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겐 없는 세 번째 손을 가졌다며 웃던 K. 물감이 묻은 것처럼 눈가가 뻑뻑해진다. 신발을 구겨 신으며 현관을 나선다.

 

  약국은 사거리 편의점 옆에 붙어 있다. 약국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불빛이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도 보인다. 약국이 있는 자리는 터가 좋지 않은지 몇 년 사이 여러 번 가게가 바뀌었다. 약국은 전의 가게들보다 손님이 잦은 편이니 조금 오래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나른한 얼굴로 약을 꺼내주는 주인여자의 얼굴에서, 이마에 드러난 푸른 핏줄에서 그녀가 조만간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하얀 불빛 속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온다. 각종 제약회사에서 쏟아져 나온 감기약들이 피라미드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선반 옆에 29인치 텔레비전이 놓여 있다. 뭘 드려요? 마르고 긴 손가락으로 옷깃에 붙은 하루살이를 떼어내며 여자가 묻는다. 소화제 하나 주세요.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여자 앞에 선다. 여자는 허리를 숙이더니 더듬거리며 소화제를 찾는다. 손은 약을 찾으면서도 귀는 계속 텔레비전을 향해 열려 있었던 건지 여자가 불쑥 입을 연다.


  요즘 방화가 극성이죠.


  방화요?


  네. 뉴스 안 보세요?


  난 그제야 불이 난 집을 화면 가득 비춰주고 있는 텔레비전을 응시한다. 여자는 언제나처럼 나른한 얼굴로 직사각형의 약 상자를 내 앞에 내민다. 상자 표면에 바스러진 하루살이의 날개가 묻어 있다.


  저 동네…… 여기서 가까운 곳인데.


  그렇죠. 방화범이 이 부근에 있나 봐요. 이 근처 동네에서만 벌써 네 번째 연속 방화를 했다더라고요. 사회에 여간 불만이 있는 게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불을 놓는 심보는 뭔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다 문득 시선이 여자의 배로 향한다. 곡선을 그리며 살짝 나와 있는 배. K와 약국에 들렀던 한 달 전 어느 날, 여자는 우리에게 임신 소식을 알려주었었다. 자기에게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유난히 입이 가벼워지는 여자였다. 이제 얼추 4개월을 넘어섰을 태아를, 그 손바닥만한 몸을 상상해본다. 몸 안에 또 하나의 몸을 품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양수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어머니의 심장 박동소리를 듣는 아기를 생각하자 무심결에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내 아랫배를 어루만져 본다. 있을 리 없는 자궁에 더운 김이 차오르는 것 같다. 소화제를 손에 들고 약국 문을 나서다 뒤를 돌아본다. 평행선의 머나 먼 끝과 끝에 선 것처럼 여자와의 간격이 멀게 느껴진다. 여자와 내 사이엔 열고 들어갈 수 없는 유리문이 있다. 수십 번 호르몬 주사를 맞아도 열 수 없는 문이다. 차갑고 섬뜩한 것이 가슴 속에 범람하는 것처럼 피가 서늘해진다. 신호등의 초록색 불이 깜박깜박 명멸하며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떤다.

 

  ‘사라’는 내가 가진 마네킹의 이름이다. 미용 실습 마네킹은 사라처럼 저마다 인턴들이 붙인 외국이름을 갖고 있다. 다른 마네킹에 비해 눈초리가 살짝 쳐진 사라는 미용실을 그만 둔 고참의 것이었다. 정말 지겨워서 못 사라. 매일같이 퍼석한 머리칼이나 만지면서 어떻게 사라. 우스갯소리처럼 사라를 입 끝에 붙이던 고참은 플라스틱 분리수거 통에 사라를 버리고 떠났다. 난 패잔병처럼 남겨진 사라를, 사라의 멍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모든 걸 함구하고 있는 것 같은 그 눈은 너를 닮아 있었다. 난 차갑고 딱딱한 사라를 품에 안았다. 너의 호흡이 품안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집 앞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K는 내가 안고 온 머리통만 있는 마네킹을 보고 흠칫 놀랐다. 뭐야, 마네킹이네. 난 사람 머리인 줄 알았어. K는 민망한 듯 웃었다. 코끝을 만지는 K의 손가락에 붉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아, 이거 물감이야. 그림을 그리다 왔어. 눈초리를 부드럽게 휘며 말하는 K의 입에서 밀려나온 입김이 내 어깨에 닿아 부서졌다. 새 작품을 그리는 중이야. 너에게 선물해 주려고……. 나는 마네킹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K는 습관처럼 내게 선물을 주는 걸 좋아했다. 가끔씩 내 눈동자 속에서 원인 모를 결핍을 본다고, 그 삭막함이 나를 낯선 사람처럼 보이게 할 때가 있다고, 그래서 그 결핍을 자신이 채워주고 싶다고 K는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난 등뼈에 침이 꽂혀 마비된 고등어처럼 몸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차갑게 얼어붙는 가슴과 달리 손바닥은 축축하게 땀이 났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너에 대한, 너의 존재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지 않는 동안 우리는 함께였다. 사라를 집으로 가져오던 그날, 그때의 우리에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머리카락 속에 벌레가 숨어 있는 듯하다. 스멀스멀 무언가가 두피를 기어 다닌다. 나는 흰 고무장갑을 낀 손을 들어 머리를 벅벅 긁는다. 장갑에 묻은 파마약이 머리카락에 드문드문 묻는다. 스물다섯 번째 롤을 말고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는지 의자에 앉은 여자는 잠이 들었다. 나는 가끔씩 앞으로 까닥까닥 숙여지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당겨 능숙하게 롤을 말아 올린다.


  파마 세팅이 끝난 여자 옆에 K가 앉아 있다. 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떠 본다. 아니, K가 아니다. 이 남자의 왼쪽 눈가엔 점이 없다. 깨끗한 가위를 들고 남자 앞에 선다. 다크블루로 머리를 염색하러 왔던 K의 모습이 포말처럼 눈앞에 밀려왔다 사라진다. 남자의 긴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잡고 싹둑싹둑 잘라낸다. K의 전화기는 오늘도 꺼져 있지만 내가 가진 모든 불빛이 꺼진 게 아니므로 아직은, 괜찮다. K는 내게서 모든 걸 가져가면서도 단 하나, 내게 선물했던 붉은 색 그림만은 앗아가지 않았다.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그림이 깊고 절절한 상처라는 걸 난 알 수 있었으므로. 상처 위로 수없이 돋아난 붉은 피딱지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너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너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넌 불길에 휩싸인 사람처럼 몸을 비틀었다. 속이 메스껍고 토악질이 나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사라에게 새로 씌어 놓은 가발이 엉망으로 잘려 있다. 바닥에 포자처럼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밟으며 너에게 다가간다. 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구석에 앉아 있다. 너의 발 앞에 놓여 있는 텅 빈 약 상자를 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너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난 네가 쥐고 있는, 사라의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낀 가위를 뺏는다. 약을 사다 줘. 네가 신음처럼 내뱉는다. 너는 비타민제를 먹듯이 약을 복용한다. 두통에서 복통으로, 그리고 불면증에서 오는 고통으로까지 너의 통각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전이되었다. 너에게 줄 약을 사러 약국에 갈 때마다 난 수면제 수십 알을 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수면제를 꾸역꾸역 식도로 밀어 넣고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진 너를 상상한다. 내 상상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너의 얼굴은 평온하다. 날이 갈수록 더 크고 깊은 고통을 호소하는 너를 보며 난 어쩌면 그 방법만이 민감하고 잔인한 너의 그 통각세포의 성장을 멈추게 해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넌 언젠가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거야. 그땐 온몸이 아파서 죽게 되겠지.


  너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너는 내 눈을 마주본다. 너의 작은 동공 속으로 사라의 머리카락처럼 조각조각난 내 세계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고통은 사람을 못 죽여. 네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한다. 난 성큼성큼 텔레비전 앞으로 걸어가 전원을 켠다. 뉴스가 흘러나온다. 약국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방화 사건에 대한 뉴스다. 방화가 일어난 시각, 화재사고를 신고한 주민은 용의자로 보이는 여성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용의자는 얼굴에 화상 자국을 갖고 있는 것으로……. 리포터의 기계적인 음성을 들으며 난 무심결에 내 얼굴을 더듬는다. 손가락 끝에 와 닿는 피부에 화상 자국 같은 건 만져지지 않는다. 창문 밖을 바라본다. 저 멀리 불이 켜진 사거리의 약국이 보인다. 약국 주인여자도 이 뉴스를 보고 있을까. 여자의 뱃속에선 아이가 얼마만큼 더 자라났을까. 여자는 어떤 기분으로 출산예정일을 기다리고 있을까. 난 눈을 지그시 감고 생리대를 샀던 날을 떠올려 본다. 위조한 주민등록증으로 담배를 사는 미성년자처럼 계산대 앞에 선 내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딸기 우유와 함께 생리대 바코드를 찍은 후 무표정한 얼굴로 가격을 말했다. 생리대를 사는 일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다. 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생리대를 가방에 넣었다.


  너를 닮은 아기를 낳는 상상을 해 봤어.


  그 말이 나를 얼마나 힘들고 두렵게 했는지 K는 모를 것이다. 나를 얼마나 기쁘고 설레게 했는지도.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생리대를 조심조심 뜯은 후 팬티에 눌러 붙였다. 한 번도 착용한 적 없는, 만져본 적도 없는 생리대였다. 생리대를 찼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속옷 안으로 느껴지는 불편한 감촉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랫배가 묵직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기가 너를 닮으면 분명 무척 예쁘겠지.


  어린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말했던 K. 그렇게 좋아했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성전환자라는 걸 알았을 때 K는 더 큰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K가 화를 냈다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내 뺨을 모질게 내리치기라도 했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 같다. 내 눈 속에서 결핍을 본다고, 메마른 사막을 본다고, 그곳에 물기를 주고 싶다고 말했던 K의 눈이 사막처럼 변해버린 걸 보는 건 뺨을 맞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K의 모습이 잔물결처럼 일렁인다. 난 드라이기 전원을 끄며 K를 바라본다. 목덜미에서 이국의 냄새가 나던 K. 머리를 감겨줄 때 긴 속눈썹이 달린 눈을 지그시 감던 K. 문 닫을 준비를 하는 미용실 안에 쭈뼛쭈뼛 들어선 사람은 얼마 전 머리를 자르러 왔던 K를 닮은 남자다. 난 예전에 들었던 실없는 농담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피식 웃는다. K는 더 이상 이 미용실에 오지 않는다. 미용실은 수없이 많고, 수없이 많은 곳 중 어디로든 그는 갈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에 남아있을 다크블루도 서서히 지워질 것이다.


  저, 안녕하세요.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바닥을 쓸던 빗자루를 멈춘다. 굽혔던 허리를 펴고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뭔가 망설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앙 다문 입술까지도 K를 닮았다. 제가 며칠 전에 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는데, 음, 그쪽이 제 머리를 잘라 주셨잖아요. 사람들이 다 머리 덕에 인물이 산다고 하더라고요.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 뒤통수를 긁으며 말한다. 사실 여기 여러 번 왔었는데…… 저 모르시죠? 남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만다. 남자가 생경하면서도 낯익다. 난 어쩌면 지금 내게 남은 K의 흔적을 만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남자는 검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분홍색 상자를 꺼내 내민다. 수제 쿠키에요. 늦게까지 일하는데 배고프실 것 같아서. 손을 내밀어 상자를 받는다. 마네킹처럼 몸이 딱딱해진다. 손가락으로 상자를 감싸 쥔다. 손등 위에 푸른 핏줄이 돋아난다. 혹시…… 당신도 내 안에서 결핍을 보았나요? 내 눈동자 속의 메마른 사막을 당신도 보았나요? 그래서 당신도 내게 무언가를 선물해주고 싶어졌나요? 나는 목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킨다.


  쿠키를 입안에 넣는다. 달다. 미처 삼키지 못한 부스러기가 혀끝에 닿아 부드럽게 녹는다. 쿠키를 하나 더 삼킨다. 쿠키 냄새가 매캐한 향냄새로 번진다. 허물을 벗기 직전 뱀의 눈처럼 시야가 뿌옇게 변한다. 짙은 향 연기 속에 흐릿한 영정 사진이 있다. 손을 뻗어 영정 사진을 잡는다. 아버지의 사진이다. 내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급성 뇌출혈로 쓰러졌던 아버지. 유실물센터에 버려진 물건처럼 꼼짝 못하고 병동 침대에 누워 지낸지 보름 만에 아버지는 고인이 되었다. 그 해 겨울, 난 수술대에 올랐다. 내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불을 끄고 싶었다. 내 삶에서 아버지를 떼어낸 후에야 난 메스 앞에 내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영정 사진을 끌어안는다. 눈에서 투두둑 눈물이 떨어진다. 영정 사진 속 얼굴이 너의 얼굴로 변한다. 창백한 얼굴의 네가 죽어가고 있다. 입을 틀어막는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메스꺼움을 참을 수 없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간다. 변기를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뱃속에 들어찬 것을 토해낸다. 누가 내장을 쥐어뜯는 것처럼 속이 거북하고 쓰리다. 물을 내린다. 내 안에서 튀어나온 부유물들이 변기의 시커먼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다. 화장실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 모든 걸 목도하고 있는 네가 보인다. 화장실에서 나와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화장대 위에 어제 사 놓은 상비약들이 가득 놓여있다. 그 중 소화제를 찾아 알약을 뜯어낸 후 반쯤 남은 컵의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알약이 식도의 긴 관 속으로 들어간다. 속이 견딜 수 없이 메스껍다. 손에 닿는 대로 약을 뜯어 삼킨다. 거울 속의 네가 나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다. 고통은 사람을 못 죽여. 너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말한다. 아니, 내가 너에게 말한다. 고통보다 두려운 건 언제나 너였다. 내 안에 네가 있다는 게, 어떤 방법으로도 토해낼 수 없는 네가 있다는 게, 내 삶에 영원히 네가 공존한다는 게 나는 언제나 두렵고 무서웠다. A가, 오래 전의 그 애가 생각난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 애의 화단엔 아직도 꽃이 피어 있을까. 그 꽃이 보고 싶다. 난 두 팔로 배를 감싸 안고 신음을 토해낸다.

  그때 너는 왜 내가 너의 삶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걸 허락했을까. 왜 가라앉아 있던 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걸까. 빛의 뒤에 가려진 어둠처럼, 우리는 침묵으로써 함께할 수도 있었다. 평생 나를 네 안에 가둘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나았을 거라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여자가 되고 싶어요.


  오랫동안 가슴 속으로 삭혀왔던 말을 음성으로 끄집어내는 건 순간이었다. 너는 처음으로 그 말을 가족 앞에서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뺨에 불이 일었다. 얼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다시 말해 봐.


  여자가…….


  너는 한 번 더 세게 맞았다. 턱이 돌아갈 만큼 아버지의 손은 매서웠다. 네 뺨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걸 본 어머니는 작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흐느낌이, 그 낮은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로 변해 너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너에게 멈추라고 말했다.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조금 더 나은 때가 올 거라고 했다.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저는, 제가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방바닥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너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직업군인을 해본 적 있는 아버지는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너를, 그리고 나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다시 말해 봐.


  ……여자가 될 수 없다면 저는 죽을 거예요.


  막 변성기를 끝낸, 솜털이 보송한 소년이었던 너에게 그렇게 강한 의지가 있을 줄 난 미처 알지 못했다. 너는 그날 쉴 새 없이 구타를 당했다. 아버지는 자꾸만 다시 말해보라고 했고 미련한 너는 자꾸만 대답을 했다. 이8 하나가 부러지고 코뼈가 내려앉은 후에야 너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던 불길은 잦아들었다.


  네가 여자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는 소문은 기름에 옮겨 붙은 불처럼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전교에 그 소문이 퍼진 후부터 너는 긴 정적과 함께해야 했다. 사물함과 책상에는 잘 지워지지 않는 매직으로 온갖 욕설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는 너를 성적으로 비하하는 말도 많았다. 너는 걸레를 쥔 손에 힘을 주어 욕설들을 닦아냈다. 저 더러운 호모 새끼. 너의 등 뒤를 지나가던 아이들은 그렇게 소곤거리며 낄낄댔다. 너는 더러운 호모 새끼가 아니었다. 넌 단지 네 안에 나를 품고 있을 뿐이었다. 난 동성애자가 아니야. 네가 중얼거렸다. 알아. 나는 손을 내밀어 너를 깊이 안았다. 너는 내 어깨에 너의 고개를 묻었다.


  너는 꿋꿋이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에서 너를 감싸 안았던, 그리고 언제까지나 너의 편이 될 거라고 했던 어머니를 위해서 너는 그 파랑을 견뎌야 했다. 너와 같은 반이었던 서른 세 명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너를 따돌리고 괴롭혔다. 급식소에서든 체육관에서든 너는 혼자였다. 새 학기를 맞아 특별활동 부서를 정하던 날 너는 반 애들의 눈치에 밀리고 밀려 전혀 흥미도 없는 미술부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너는 A, 그 애를 만났다. 아무 준비물 없이 미술부실에 들어선 너에게 흔쾌히 자기 물건을 빌려주었던 아이. 미술부의 부장을 맡고 있던 아이.


  교실에 벗어놓은 교복 재킷이 칼로 난도질되고 여자 립스틱으로 범벅이 되었던 날, 넌 아무도 없는 미술실을 찾아가 숨죽여 울었다. 가슴이 타는 듯이 뜨겁고 아팠다. 불길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네 가슴 속 여기저기에 놓인 도화선을 타고 번지는 것 같았다. 너는 텅 빈 도화지에 붓이 가는 대로 물감을 찍어 발랐다. 도화지는 불처럼 붉고 강렬한 색의 물감으로 범벅되었다. A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너는 눈물을 멈춘 후에야 알았다.


  꽃을 그렸구나.


  A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붓을 멈추고 A를 바라보았다.


  붉은 꽃…… 그렇지? 우리 집 화단에도 이런 꽃들이 피어 있어. 다음에 한 번 보러 와.


  너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날 A가 한 말은 A의 얼굴보다 더 오래 기억되었다.

 

  속은 여전히 메스껍다. 어제부턴 밥도 한 숟갈 뜨지 못했다. 무엇이 이렇게 속을 뒤집어 놓는지 알 수 없다. 약은 더 이상 고통을 진정시키지 못한다. 무시무시한 내성이 몸을 지배해 버린 것일까. 먹이사슬처럼 연쇄하는 고통과 고통 사이에 맞물린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두렵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어긋나게 했을까. 무엇이 이 모든 걸 시작되게 만들었을까. 왜 하필 나였을까. 왜 나는 너의 일부로 태어나야만 했을까.


  아. K가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니, K가 아니다. 남자의 점이 없는 왼쪽 눈가가 허전하게 느껴진다. 저 남자는 왜 자꾸 나를 만나러 오는 걸까. 저 남자는 왜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K는…… 그는 왜 나를 사랑했던 걸까. 그리고 나는 왜 K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K가 나를 온전한 나로서 사랑해줄 것이라,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믿었던 걸까.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우리의 뒤엉킨 삶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K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주었을까. 그랬다면 정말 영원할 수 있었을까.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아. 나는 아픔 없이는 살 수 없다. 내가 아픔이기 때문에.

 

  약국 주인여자는 새 취미를 익힌 듯하다.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따뜻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늘어뜨린 채 여자는 섬세한 손길로 아기 양말을 짜고 있다. 여자의 나른하고 편안한 표정이 좋다. 여자는 내가 무슨 약을 얼마나 자주 사 가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여자가 이 약국에 오래 머물었으면 좋겠다. 뭘 찾으세요? 뜨개질감을 의자에 내려놓고 일어선 여자가 묻는다. 속이 자꾸 더부룩하고 메스꺼워요. 나는 느릿느릿 말을 덧붙인다. 집에 약이 있어서 먹어봤는데…… 전혀 차도가 없더라고요. 여자는 설사 증세 같은 건 없냐고 묻더니 식중독일 수도 있는데 병원 먼저 가보시는 게 어떠냐고 한다. 난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일반 병원은 스물두 살의 겨울 이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병원에 가야할 만큼 심각하게 아픈 적도 없었고, 진찰대에서 내 속을 까발려 보이는 것이 싫기도 했다. 병원은 여성호르몬을 투여 받으러 가는 것만으로 족했다. 약을 드릴 수도 있지만, 무턱대고 약을 먹는 게 좋지는 않거든요. 여자는 갈색 안경테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생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털어놓을 수 없다. 여자는 고통에 중독된 삶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얼마나 지독한 고통을 감당해야 했는지,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고 아픈 것을 얼마나 오래 견뎌야 했는지 태어날 때부터 XX 성염색체를 가진 여자가 알 리가 없다.


  혹시…… 음식을 입에 댈 때 구역질을 한다거나, 먹은 걸 토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요?


  여자가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며 묻는다. 난 대답 없이 여자를 바라본다. 간혹 배탈이랑 임신을 헷갈리는 분들이 있어서요…… 어떤 분은 임신하고 한참이 되어도 그걸 못 알아채더라고요. 여자의 말을 듣는 순간 팔뚝에 자잘한 소름이 비늘처럼 돋아난다. 사라의 눈처럼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려진다. 임신일 수도, 있을까요?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여자가 그 떨림을 알아채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가, 임신한 것일 수도, 있는 건가요? 한 번 더 묻는 순간 뻐근하게 목이 멘다. 전에 비해 더 볼록해진 여자의 배가 시야 속으로 들어온다. 흔들리는 목소리로 임신 테스트기를 달라고 말한다. 그것을 사지 않으면 뱃속에서 느껴지는 이 떨림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자는 금세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온다. 난 거의 빼앗다시피 여자의 손에서 그것을 집어 든다. 참, 방화범 잡힌 거 들으셨어요? 임신 테스트기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나를 향해 여자가 묻는다.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뜨개질을 하며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들여다봤을 것 같은 여자는 친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얼굴에 화상이 있는 여자였어요. 나이도 젊고. 스물다섯밖에 안 돼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앞으로 징역을 몇 년이나 살게 될지…… 아, 있죠. 그리고 그 여자가 진술을 하는데, 사실은 자기랑 헤어진 애인 집에 방화를 하려고 했는데 끝내 그러지는 못하고 다른 집에 분풀이를 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한 번 방화를 하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고 그래서 자꾸 불을 놓게 됐다고 하던가? 요즘 세상엔 싸이코들이 참 많죠. 여자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난 임신 테스트기를 주머니에 더 깊이 쑤셔 넣는다.

 

  핸드폰이 진동한다. 폴더를 열어보니 남자의 문자가 와 있다. 남자는 내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한다. K가 그랬듯, 남자는 친절하고 자상하다. 어쩌면 이 남자는 정말 K인지도 모른다. 난 아직 K와 헤어지지 못하고 수십 명의 그를 만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영원히 K를 내게서 떼어낼 수 없는지도 모른다.


  화장실로 가 세면대 위에 놓아둔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선명한 한 줄이 나타나 있다. 나는 조금 실소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기대한 내가 우습다. 우스움을 견딜 수 없어서, 난 마침내 울기 시작한다. 상상임신은 비로소 내 안에서 끝이 났다. 잔인한 메스꺼움도 멈췄다. 나는 변기에 주저앉아 어린애처럼 운다. 네가, 나의 유일한 친구인 네가 함께 우는 게 느껴진다. 울지 마. 울지 마. 내가 너를 달래고 네가 나를 달랜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뜨지 않듯이, 너와 나도 결국 둘일 수 없다. 우리는 선명한 한 줄처럼 영원히 하나일 뿐이다.

 

  오래 전 그때, 단 둘만 있었던 미술부실에서 A는 말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몸 안에 신을 품고 있다고, 그런 어머니에 비하면 가슴 속에 여자라는 또 하나의 성을 품고 있는 너는 평범한 거라고. 결국은 숙명처럼 떼어낼 수 없어서 받아들인 것뿐인데 왜 그게 죄가 되는 거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A는…… 그 애는 네가 그린 불이 꽃이라고 말했다. 네가 꽃을 그린 거라고, 너의 불 속에서 꽃을 보았다고, 너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사실은 꽃이었다고, 네 안에 붉은 꽃이 만발하고 있는 거라고…….


  K가 완성한 그림을 내게 선물했을 때 난 순간 K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A의 얼굴을 보았다. K의 그림은 그때 미술실에서 네가 그린 그림과 닮아 있었다.


  ……뭘 그린 거야?


  붉은 꽃이야.


  K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붉은 꽃, 그 한 마디만으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고마워.


  난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K가 따뜻한 손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난 결심했다. 너와 내가 평생 안고 살아온 가슴 속 불꽃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K는 이해해 줄 것 같았다. 불이 꽃이 되고, 또 꽃이 불이 되는 것을 알아봐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가슴 속에 타오르는 화(火)를 화(花)라고 속삭여 준 두 번째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문을 펼친다. 회색 종이 속에 방화범 여자의 사진이 있다. 총 여섯 번의 방화를 저질렀다는 그녀는 점퍼를 뒤집어쓴 채 콩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난 손가락을 뻗어 그녀를 어루만진다. 점퍼 속에 숨겨져 있을 화상 자국을 어루만진다. 당신도…… 당신도 지독한 고통에 중독되어 본 적이 있지 않나요? 불을 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지 않나요? 그래서, 붉게 핀 꽃을 보고 싶어서, 그 만발한 꽃을 보고 싶어서 불을 지른 게 아니었나요……. 나는 그녀처럼 몸을 웅크려 앉는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사라가 있는 집. 그리고 녹슬어가는 가위와 네가 있는 집. 이 집에 K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K는 떠났고 붉은 꽃은 내 곁에 남았다.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리라, 내가 이길 수 있으리라 믿었던 고통, 그것의 이름이 슬픔이었다는 걸 이제 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의 꽃잎이 아직 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괜찮다. 언제나 무표정한 사라,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사라, 사라의 검고 슬픈 눈…… 너를 닮은 그 눈과 눈높이를 맞추고 라이터를 집어 든다. 부어놓은 기름을 따라 불은 금방 사라의 머리카락에 옮겨 붙는다. 매개한 향냄새를 풍기며 사라가 타들어간다. 사라가 붉게 핀다. 그 만발하는 꽃잎에 휩싸인 사라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벽에 걸린 그림 위에도 불을 놓는다. K의 향기가 번져가는 꽃잎과 함께 흩날린다. 퇴색하는 계절처럼 짙고 강한 향기다. 오랫동안 앓고 있던 끝나지 않는 계절이 이제야 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난 그 아래에 비스듬히 거울을 놓고 앉는다. 그리고 가위를 집어 든다. 꽃은 더욱 흐드러지게 피고 그 환한 광경 속에서 난 사라처럼 싹둑싹둑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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