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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문학상 작품보기

제 28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분 당선작 - 다소 타히티적인

  • 작성자 : 계명대신문사
  • 작성일 : 2008-05-25 22:04:31

 

다소 타히티적인



박서련(건국대 인문학부, 1)


1


 

  나는 우선 몇 개의 어항과 폴 고갱에 대해 적어야 한다.

 

  가장 큰 어항은 주방과 거실을 가르는 경계에 있었다. 묘사하라면 컸다고, 아주 큰 어항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사실 어항이 아니라 가구였다고 그것을 소개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가끔 거기에 들어가 눕는 내 몸을 상상했으므로, 그것은 유리 욕조 또는 관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명과 산소여과기, 그리고 온도조절기가 달린 그것이 투병중인 중병 환자의 침대를 연상시킬 때도 있었다. 밤중에 그 장치들이 돌아가는 긴 기계음을 들으며 깨어나,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불러오려 애쓸 때가 종종 있었다. 불면의 원인이 그것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것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영문 모를 기계음 때문에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런 것을 이명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방에는 환히 빛나는 흰 돌이 깔린 조그만 어항들이 있다. 어머니 방과 내 방에 각각 하나씩. 뼈가 비칠 만큼 작고 약한 물고기들이, 내 방 어항에는 예닐곱, 어머니 것에는 그보다 조금 많이 들어있다. 정확히는 몇 마리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어항에 먹이를 푼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것들을 사온 사람은 어머니였고, 그렇다면 관리하는 이도 당연히 어머니여야 했다. 사실 나는 그 작은 어항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뜻 모를 불쾌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에둘러 해 본 적이 몇 번 있다. 그게 왜 내 방에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어머니의 대답은 언제나 심플했다.

  관상용이잖니.

  잠을 설칠 때마다 나는 모로 누워 그 어항을 노려보곤 했다. 눈뜬 채 잠든 작은 물고기들이 바깥에서 스미는 빛을 받아 형형했다. 그럴 때면 늘 어항 안에 손을 넣고 휘젓고 싶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빛이 으스러지며 비릿한 냄새를 풍길 것 같았다. 그러면 좀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폴 고갱은 앞서 말한 세 개의 어항 중 가장 큰 것과 마주보고 있었다.

  주방을 향한 거실의 벽면에 걸린 세 점의 그림, 그것이 내게는 폴 고갱(들)이었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언제 결혼하니?>,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두 점은 나란히, 상대적으로 폭이 긴 <우리는…>은 그 밑에 배치되어 있어서 눈을 가늘게 뜨면 그것들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눈과 입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면도상 식탁과 어항과 그 그림들이 일직선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사 때마다 나는 어항의 푸른 조명으로 여과된 폴 고갱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식사를 마친 어머니가 어항에 먹이를 풀면 가라앉아있던 열대어들이 수면으로 방사되듯 떠올라 예수의 나신과 타히티 처녀의 우람한 팔 위를 유영하곤 했다. 물살을 따라 이미지들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펴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폴 고갱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2

 

 

  오늘은 기분이 좀 어때요?

  상담은 언제나 그런 말로 시작되었다. 회화적인, 말하자면 영어 문제집에 나오는 다이얼로그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문장이었다.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인사는 기계적이지만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구상해야 하므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표준적인 다이얼로그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국어로 된 대화는 영어보다 난감했다.

  자, 뭐든 좋으니까 이제 얘기해 봐요.

  숨이 막히는 것은 대개 그 순간이었다. 입을 열면 기포가 뭉텅 쏟아질 것 같았다. 뭐든 좋으니까. 이야기해 봐요. 머뭇거리는 사이에 질문들은 연착하고 있었다.

  환절기인데 몸은 좀 어때요? 어머니는 잘 지내시지요? 약은 잘 먹고 있구요?

  학교는 아직, 안 나가고 있나요?

  

 


  

3

 

 

  아랫도리에 속옷 한 장 달랑 걸친 채로 나는 화장실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문 밖에서는 아이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마음이 점점 졸아들었다. 곧이어 철퍽, 물을 튀기며 푹 젖은 옷가지들이 문에 걸렸다. 변기에 담갔다 꺼낸 것인지, 깊이 들이마시기 꺼려지는 습하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실수인 척 자꾸 내 옷을 밟아서 일부러 화장실까지 도망 온 것이었다. 벽에 걸쳐둔 옷가지들이 칸막이 너머로 끌려 내려갈 때만 해도 나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수업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깔깔대며 밖으로 나갔다. 맨살을 드러낸 허벅지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나는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다른 생리현상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칸 밖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얼른 나가 화장실 문을 잠갔다. 세면대에서 체육복 바지를 대충 헹구어 짰다. 채 냄새도 가시지 않은 그 젖은 옷을 걸치고 교무실로 갔다. 다행히 담임이 자리에 있었다. 조퇴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되도록 나와 눈을 맞추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젖은 바지 때문만은 아니게 자꾸 오한이 일었다. 조퇴증을 받아 교무실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나는 계속 으슬으슬 어깨를 떨고 있었다.

  반 아이들이 이름을 대체할 별칭으로 내게 부여한 타이틀은 '걔'였다. 혼자 학교에 와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공부하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큰 불편은 없었지만 종종 마주치게 되는 크고 작은 학대들은 견디기 어려웠다. 가령 젖은 바지를 입고 돌아가야 했던 그 날이 그랬다.

  모두가 나를 그렇게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주동이 있었고 나머지는 방관의 역할을 맡았다. 어느 아침 등교하자마자 이유 없이 따귀를 맞은 적이 있다. 때린 아이는 주동중의 하나였다. 그 애는 미안하다고 하는 대신 자기 친구들에게 돌아가 이제 됐냐, 고 말했고 그 애들은 굳이 소리를 낮추려고 하지도 않으며 웃었다. 나는 내가 유희거리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교실은 잠깐 웅성대는 듯 하다 이내 잠잠해졌다. 

  내가 '무엇'인지는 교사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개입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교실의 방관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와 눈을 맞추는 것을 꺼리는 교사는 담임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기피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내 눈이 도움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인간적인 몰이해, 또 더더욱 인간적인 대처방식,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울지 말자' 또는 '죽고 싶다'고 되뇌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잘 묘사할 수 없다.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단조의 음악을 듣다가 왈칵 눈물을 쏟았을 때의 마음과 닮지 않았나 싶다. 그때 나는 벙어리나 아직 말을 다 못 배운 아이처럼 신음소리로 울었다.

 

 

 

  

4

 

 

 

  물리적으로 1950년대 타히티의 자살률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말하자면 어떤 말로 내 기분을 대신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상담은 화, 목요일 오후 네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한 시간씩이었다. 상담을 시작하고 나는 입학한 뒤 했던 말들을 모두 합해놓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했지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이것은 내 문제를 찾기 위한 다이얼로그야, 라고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내 발성이 두려워졌다. 두려움과 별개로 움직이는 혀, 는 아예 공포였다.

  등받이 깊숙이 몸을 누이면 그 때부터 상담이 시작되었다. 나는 천장을 보면서 말하고 들었다. 방 안에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 없고 음성들만 있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가 낯설어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뭐든 좋으니까, 이제 얘기해 봐요.

  엄마는 폴 고갱을 좋아해요.

  그래요?

  엄마는 미술 선생님이에요.

  중학교요, 고등학교요?

  미술학원이요.

  아. 뭐랄까, 센스가 있으시겠어요.

  엄마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다시 한 번 말해볼래요?

  거실에 폴 고갱의 그림이 세 점 있어요. 그 중에 하나는 제목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예요. 제목이 좀…… 거창하지요?

  그러네요. 굉장히 심오한 제목이군요. 어떤 그림이지요?

  많은 인물이 나와요. 그림 폭이 길거든요…… 한쪽에 갓 태어난 아이와 젊은 여자들이 웅크리고 있어요, 그리고…… 나무열매를 따는 사람도 있고 젊은 여자와 노인도 있어요. 한켠에는 돌로 된 신상도 있어요. 많은 인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어요.

  오, 한 번 보고 싶네요.

  엄마가 처녀 때…… 그러니까 대학 다닐 때 직접 모작한 거라고 했어요. 원본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꽤 큰 그림이에요. 아시지요? 폴 고갱 특유의, 압도적인 황색…… 그런데 그 그림은 그리 노랗지만은 않아요. 푸른 고갱…… 그래요 그 그림은 푸른색으로 보였어요. 가끔 일렁거리며 왜곡되어 보이기도 했어요. 나는 그게 너무…… 너무 싫었어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어요. 변색된 폴 고갱.

  변색된 폴 고갱이라.

  그냥 그게 그렇게…… 못 견디게 싫었다구요. 나중에 안 건데, 고갱이 자살 시도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이었대요. 이런 얘기 하면 되는 거예요?

  네, 지금 아주 잘 하고 있어요. 또? 또 무슨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항에 대해서. 어때요?

  ……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네.

  그럼 뭐, 괜찮아요.

  죄송해요.

  죄송하기는요. 더 하고 싶은 얘기 없어요? 생각나는 거.

  

 


  (선생님 여기는, 수압이 너무 높은 것, 같, 아요.)

 

 

 

 


 

6

 

 

  학교에 갔는데 책상이 없었다.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할 것 같았지만 마땅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내 책상 있던 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몇몇 아이들이 수군대거나 킥킥거리는 것을 선 채로 보고 있었다. 조회시간이 되자 담임이 들어왔다. 그는 좀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주번에게 책걸상을 가져오라 시킨 다음 그는 눈에 보일 듯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새 것이 왔다. 원래 책상 서랍 속에 들어있던 교과서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껏 가방을 맨 채 그냥 서 있었다. 그대로 교실 뒷문으로 나갔다.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을 때 전화가 왔다. 담임이었다. 이상하게도 겁이 나지 않았다.  공부는 잘 되고 있느냐는 말로 그가 먼저 다이얼로그를 열었다. 대답을 얼버무리자 곧바로 본론이 튀어나왔다. 나의 교우관계, 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는 되도록 아이들에게 맞춰 생각하고 눈치 있게, 튀지 않게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진정으로 피로한 기색이 느껴졌다. 알았다고, 되는대로 대답했다. 무단조퇴에 대한 얘기는 없는 걸까, 생각하며 끊으려던 찰나에 그가 덧붙였다.

  어머니와도 면담 좀 해야겠다. 내일 모시고 와.

 

 

 

  전화로 말하기가 난감하기도 하고, 입시미술 강사인 어머니를 밤늦게까지 기다리기도 힘들 것 같아서 어머니의 학원으로 갔다. 어머니를 조용히 불러내 학교에 와 달래요, 한 마디 전한 다음 금방 돌아설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학원은 등하교 길에 볼 수 있는 주상복합빌딩 4층에 있었다. 학원은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넓었다. 나는 다소간의 긴장을 가지고 문을 열었다. 복도 벽에 좋은 대학에 진학한 원생들의 이름이 붙은 소묘와 정물화가 걸려있었고 그 앞을 교복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지나다니고 있었다. 낯익은 교복을 입은 아이도 몇 있었다. 나는 그 애들이 나를 알아보지나 않을까 생각했다.

  쟤, 3반 걔 아냐? 걔 맞는 것 같은데…… 여긴 어쩐 일이래 걔가? 걔, 여기 다니나? 걔가 왔다고? 어디, 어디? 걔, 걔, 걔 운운.

  나도 모르게 몸이 벽 뒤로 숨었다. 정말로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있는 반을 찾았을 때는 수업이 막 시작한 즈음이었다. 빙 둘러앉은 학생들이 가운데의 사과 두 알과 꽃병, 찻주전자 따위의 물건을 제재로 정물화를 그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문 앞을 서성이는 나를 알아챈 것은 학생들이 그린 밑그림에 이미 꽤 양감이 생긴 뒤였다.

  무슨 일이니? 밖으로 나와서 문을 닫고, 어머니는 팔짱을 끼고 상체를 약간 뒤로 젖힌 채 물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어머니가 재차 말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왔던가를 생각했다. 도무지 입이 열려주지를 않았다. 얘, 엄마 바쁘단 말야! 마침내 어머니가 언성을 높일 때 까지도, 나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7

 

 

  폴 고갱이 사랑해서 말년을 함께한 섬 타히티, 에는 슬픔을 뜻하는 어휘가 없다고 한다.  1950년대 그 섬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죽었다. 어느 인류학자는 두 사실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 거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름이 없었으므로 타히티 사람들은 그 감정의 정체를 몰랐을 것이고, 정체가 불분명했으므로 그것은 쉽게 과장 또는 확장되었을 것이다. 슬픔이 마침내 목숨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의 이름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칼을 삼킨 것 같은 불안과 통증에 시달렸다. 무서운 점은 이 칼의 이름이 단순히 '슬픔'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슬픔이라 부르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았던 것, 슬픔보다 훨씬 예리하고 단단한 것. 언제 이 칼이 나를 겨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내가 무서워졌다.

  결국 그 칼의 주인은 나였으므로.

 

 

 

 


 

8


  약국은 언제나 붐볐다. 누군가 나가면 또 다른 누군가 들어와 자리를 채웠고 손가락 수 만큼의 사람은 늘 있었다. 거동이 심하게 불편해 보이는 사람과 그 보호자, 들이 많았고, 기침을 심하게 하는 사람, 새끼손가락에 깁스를 한 사람 등 온갖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다 모여 있었다. 개중 내가 제일 건강한 사람 같아 나는 조금 민망했다. 

  약사는 처방전을 맡긴 이름들을 차례대로 불러 세웠다. 앉아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느린 걸음으로 나가 약을 받았다. 나는 그 이름들을 듣고도 곧 잊어버렸다. 이윽고 내 이름이 차례를 맞았다. 약사는 투약 방법에 대해 설명하며 내 얼굴을 힐끗힐끗 보았다. 나는 약들의 이름을 대강 알고 있었으므로 약사의 행동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항우울제, 신경안정제, 항정신병제…… 약주걱에서 그 이름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순간을 나는 생각했다. 넘길 때 목 안을 답답하게 하는 약냄새가 반사적으로 기억났다.

  무엇을 탓해야 하는 걸까.

  따돌림이 나로 이 약을 먹게 한 것일까, 내가 이런 약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 따돌림을 받은 것일까? 이 모든 일의 당위성을 나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애초에 무엇이든, 이유가 있었을까. 그 이유가 정말,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정말로.

  집에 돌아와서 나는 외투도 벗지 않고 약봉투부터 꺼냈다. 1회분을 뜯어 한 번도 먹이를 준 적 없는 내 작은 어항에 그것을 한, 알, 한, 알, 띄웠다. 캡슐은 끌러 가루를 뿌렸다. 가루약이 어항 안을 희뿌옇게 만들었다가 이내 다시 맑아지고, 알약들이 조금씩 녹아 풀어지는 것을, 나는 시간을 두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9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담임선생님이 어머니 모셔오라고 한 데요.

  맞다…… 엄마는 내가 사고라도 친 게 아닌……지 전전긍긍하면서 나랑 같이 학교에 갔어요. 차라리 사고를 쳐서 소환된 거였다면 덜 창피해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담임은 내 눈치를 보면서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면담이 끝나고 엄마가 교무실에서 나올 때, 엄마 얼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가니까, 괜히 내가 미안해지고, ……화를 내더라구요. 조용히, 그치만 분명히. 그리고 울었어요.

  음? 울다니요, 어쩐 일로요?

  학교에 안 다니겠다고 했거든요.

  그때 그렇게 된 거였군요?

  네. 왜 학교를 안 간다는 거야, 그러면서, 내 어깨를 밀치면서…… 울었어요.

  담임선생님은 어머니께 뭐라고 했나요?

  나를 정신병원에 데려가 보라고 했대요.

  음…… 불쾌해하실 만도 하네요.

  결국은 이렇게 됐잖아요.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어요.

 

 

 

 


 

10

 


  어머니는 학교에서 내가 어떻게 불리고 있는 지를 그 때 처음 알았다. 별로 숨기려 한 적은 없었지만 어머니 역시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밤에 어머니는 내 방문을 슬며시 열었다가 다시 나갔다. 그때 나는 누워있었으나 아직 잠은 자지 않고 있었다. 문을 연 채 어머니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숨소리가 다 들리도록 방 안은 적막했고 나는 점점 빨라지는 내 숨을 붙잡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어항은 내 침대 옆 협탁에 있었다. 나는 어항 속 허공에 멈춰있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관상용, 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저것들은 태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1


  거실에 존재하는 소리는 어항에 달린 전동기들이 돌아가는 소음뿐이었다.

  나는 폴 고갱(들)을 향해 걸었다. 어항을 거치지 않고 보아도 그는 어쩐지 푸르게 보였다. 거칠게 덧발라놓은 물감 때문에 약간이지만 양감도 있었다. 나는 그림들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보았다. 푸른, 폴, 고갱(들).

  다음으로 나는 거대한 유리 어항 앞에 섰다. 약간의 숨이 필요했다. 들이마시고, 몸을 기댔다. 천천히, 어항에 닿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어항이 밀려 넘어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리 맑지 않은 파열음을 내며 유리들이 튀었다. 첨벙, 열대의 바닷물을 흉내 낸 미지근한 물도 온전히 쏟아져 내렸다.

  무슨 짓이야?

  어항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머니가 나왔다. 너 정말 왜 이러니? 어미에서 쇳소리가 나도록 카랑카랑하게 소리를 지르며.

 산소기와 온도조절기는 아직도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오른발로 걷어찼다. 각진 유리조각들 위에서 열대어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몇몇은 벌써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기 몸속의 색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약간 비릿한 냄새가 나는 물이 내 발치까지 흘러나왔다. 나는 발을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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