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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서부 최대 규모의 화랑 '윈드 갤러리' 운영

예술사업가 이기희(한구어문학·71학번) 동문

현풍에서 태어나 10살 때 대구로 와서 생활하던 이기희씨는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 나갔다가 당선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심사위원이시던 김춘수 선생님께서 대구에서 노천명 시인에 버금가는 시인이 나올 거라고 칭찬해 주셨죠” 그녀는 그때부터 문학에 대한 집념이 생겼다고 이야기했다.

대학시절, 이기희씨는 어땠을까? 그녀는 “제가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다 보니 성적이 들락날락했어요. 강의를 듣지 않고 강창이나 화원유원지에서 시간을 보내다 제적당할 뻔 했어요”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기희씨는 평소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가정 형편상 그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대 수업을 도강해가면서 미술에 대한 욕구를 채워나갔다. 물론 교수님에게 호통을 듣고 쫓겨나기 다반사였지만 말이다.

그녀는 영화 ‘밀양’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이창동씨와 안효일 씨, 고인이 된 김원도씨 함께 ‘주변문학’이라는 동인회를 만들어 활동했었다. 그녀는 “꿈이 있었기에 고픈 배를 움켜쥐고도 시를 썼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대학교 2학년 때 ‘시문학’지에 ‘가을이 지나간 풍경’과 ‘파도’가 추천됐다. 현재 그녀는 자전 소설과 자전 에세이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총학생회 부회장으로 개교 20주년 기념행사로 초청된, 육영수 여사의 수행비서 역할을 한 적도 있다. 그녀는 “육영수 여사의 수행 비서를 하며 여사의 아름다운 여인으로서의 모습을 보게 됐죠. 저희들을 청와대로 초대해 점심을 대접해 주실 만큼 자상하셨어요. 그때 여사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애쓰는데 쉽지가 않네요”라며 육영수 여사를 회상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대명캠 시절 우리학교의 모습은 어떨까? “하버드 대학을 연상시킨다고 할까요? 노천강당은 사랑과 낭만이 움트는 곳이었죠. 남학생과 다정하게 앉아있던 친구들은 다음날이면 애인관계로 발전하곤 했어요”

그녀는 4학년 때 미국문화원 라우리 원장의 한국어 교사로 일하다 우연한 기회에 미 육군 제임스 대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져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 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도착 하자마자 실내장식, 순수미술 등 미술 전반에 관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미국은 실력으로 경쟁해서 이기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 전공으로는 성공하기 힘들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화가로 제법 명성을 날렸죠. 하지만 캔버스만 바라보는 화가 생활이 지루해서 더 큰 일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적성과 맞는 큐레이터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러나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갓 태어난 첫째 딸이 다운증후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몇 년간 딸의 치료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남편이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그 상황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저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어요. 절망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또 두 남매를 위해 갖은 고생을 하신 어머니를 떠 올리면 못해낼 일이 없었어요”

그렇게 딸과 함께 남은 그녀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결심했었다. 그러다 중국계 미국인을 만나 재혼하게 됐다.

현재 이기희씨의 직업은 세 아이의 어머니면서 ‘예술사업가’다. 윈드 그룹 경영, 전시회 유치나 미술작품을 판매하는 브로커, 윈드 아트갤러리 큐레이터, 실내장식 및 가구 판매 회사 경영 등 예술과 사업의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은 선택 지수와 비례해서 인생에서 선택의 폭이 넓은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제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보고 에너지가 넘친다고 말해요”

이기희씨는 최상류층을 상대로 화랑을 운영하면서 ‘E’자가 여섯 개 들어가는 이름과 30년 넘게 쪽진 머리 덕분에 한국여자 ‘LEE KEE HEE’ 란 트레이드 마크를 달게 됐다.

앞으로 젊은 한국 화가들을 세계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그녀가 우리학교 개교 55주년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깁니다. ‘진리’와 ‘정의’는 결코 쓰러지지 않죠. 개교 55주년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세계를 향해 생명의 빛을 여는 대학’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 만이 할 수 있는 분야를 파고들기 바랍니다. 자신의 불이익(Disadvantage)을 이익(Advantage)으로 바꾸는 힘을 키우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 입니다”라며 후배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화랑 개관 기념 기획전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일복이 터졌다며 미소 짓는 이기희씨. 앞으로 그녀의 행복하고 성공적인 미래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