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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양말

  • 작성자 : gokmu
  • 작성일 : 2014-05-20 19:51:10

 

 

●제34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양말

 

 

양말
박찬훈(명지대학교·문예창작학·3학년)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양말은 생각했다.
사라졌네.
양말은 다시 한번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여자의 스타킹과 레깅스,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단색 치마, 팬티나 브래지어, 보정 속옷 같은 것들이 껍데기처럼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빨래 건조대 밑에서, 양말들은 아무렇게나 던져진 채로 빳빳하게 메말라 있었다. 여자는 양말을 말릴 때 빨래 건조대에 널어 말리지 않고 밑바닥에 대충 던져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러므로 조금만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확실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양말, 발목 부근에 FILA라고 적혀 있으나 절대 정품일 리는 없는, 시장통에서 한 손 가득 주워다 한 켤레에 천 원이면 사올 수 있는 흔해빠진 흰 양말이,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총 열 개였는데 잠에서 깨어나보니 아홉 개로 줄어 있었다. 까무룩 잠든 사이에 양말 한 짝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켤레로 따지면 4.5켤레, 커플 넷에 솔로 하나였다. 뭐, 번식 능력이 없는 사물에게 성별이 있을 리 없으니 커플이니 솔로니 운운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파트너 정도가 적절하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이유가 되어주는 파트너. 0.5켤레의 양말은 아무래도 영 쓸모가 없으니까.
양말은 공장에서 처음 상품으로 묶여나왔을 때 자신과 함께 스테이플러로 고정되어 있었던 파트너에 대해 생각했다. 입과 입이 봉해진 채로 나란히, 서로 몸을 치대며 딱 달라붙어 있었던 그 녀석. 물론 말이 좋아 파트너지 그 녀석과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들 익히 보아왔듯, 사물은 말이 없다. 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도 없거니와, 근육이나 뼈, 신경도 없다. 사물은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생각할 뿐이다. 인간은 간혹 인간 이외의 것들이―개나 고양이나 새나 금붕어, 심지어는 양말 같은―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고 다만 인간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할 뿐이라는 우매한 착각을 하는데, 이는 다분히 인간중심적인 사고다. 인간이 아닌 것들은 다들 독심술이라도 지니고 있는 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오랜 시간 공들여 언어란 체계를 발명해냈고, 이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소통에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사물은 다른 사물과 소통하기 위해 대화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차라리 교감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 교감 또한 그저 그 사물의 생각에만 머무를 뿐이어서, 결국 사물과 사물 사이엔 소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판단만 있을 뿐.
아무튼 양말은 자신이 태어난 공장에서 도매 상가로 이송되었고, 도매 상가 근처 시장통에서 좌판 펴놓고 장사하는 할머니가 짝퉁 FILA 흰 양말 백 켤레 묶음을 사들이는 통에 그 중 하나로 섞여들었다. 이내 양말은 할머니의 좌판 위에 우두커니 깔아졌고, 웬 여자가 좌판으로 다가와선 오천 원으로 자신을 포함한 다섯 켤레의 짝퉁 FILA 흰 양말들의 몸값을 치렀다. 곧장 양말은 여자의 손에 들려 여자의 원룸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양말은 내내 파트너와 입이 봉해진 채로 몸을 치대고 있었는데, 벌써 그것도 반년 전 일, 양말은 이제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운명을 공유했던 그 파트너가 어떤 녀석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양말과 그의 파트너를 이어주고 있던 스테이플러는 이미 반 년 전에 여자에 의해 뜯어져 나갔고, 어차피 열 개의 양말이 모조리 똑같이 생겼으니 여자는 그 양말들을 그냥 뒤죽박죽 신고 다녔다. 각각의 양말들에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붙인다면, 여자는 양말7과 양말1을 신거나, 양말3과 양말8을 신었던 것이다. 양말을 신고 나면 여자는 양말들을 세탁기 속에 던져 넣었다. 두어 시간 세탁기 속에서 빙빙 돌고 나면 양말은 자신의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정신까지도 말끔하게 세탁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마치 야바위하듯 뒤섞이는 양말들 속에서 양말이 자신의 파트너를 계속 기억하고 있기란 불가능했고, 물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양말은 딜레마에 빠졌다. 비록 양말이지만 이렇게 보란 듯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봤자 영원히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를 테니, 양말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양말은 모든 사물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으나,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뭣하러 생각하느냐는 자조 끝에 생각하길 포기한 채, 그냥 그렇게 정물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게 바로 사물의 죽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양말은 죽기 싫었다. 양말은 되뇌었다. 나는 양말5다. 나는 양말5다. 나는 양말5다.
나는 양말5다.

*

여자가 누워 있는 침대 옆 협탁에서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밝아오는 새벽빛이 창을 넘어와 푸르스름하게 원룸 안을 비췄다. 여자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휴대폰 알람을 끄고, 침대 위에서 허리를 옹송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이불을 옆으로 걷어치우고 화장실로 갔다. 여자는 화장실 문을 열어놓은 채 변기에 앉아 오줌을 쌌다. 쪼로로로록. 오줌발 소리가 좁은 원룸 안에 나른하게 울렸다. 여자는 계속 화장실 문을 열어놓은 채로 세수를 하고, 가글을 하고, 거울을 잠깐 쳐다보고 서 있다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빨래 건조대 옆에 놓인 책상(겸 화장대)에 앉아 퉁퉁 부은 얼굴에 스킨, 로션, 썬크림, 프라이머, 파운데이션을 덕지덕지 발랐다. 여자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 와중에 등 뒤에서 휴대폰 알람이 한 번 더 울려서 여자는 잠깐 침대 옆 협탁으로 걸어가 알람을 꺼야 했다. 뒤이어 컨실러로 잡티를 가리고, 파우더를 눌러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아이라이너로 점막을 채우고, 섀도우를 눈두덩에 바르고, 코럴핑크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볼터치까지 하고 나자 여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여자는 잠깐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거울을 쳐다봤다. 뭔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푸석한 긴 머리를 위로 틀어올려 묶었다. 얼굴이 퉁퉁 부어서 안 그래도 답답해보이는 처진 눈매가 더 처져 있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빨래 건조대에서 옷을 골라 입었다. 어차피 여자가 일하는 백화점에 도착하면 바로 유니폼으로 갈아입을 테니 출퇴근 시 입는 옷은 그냥 아무렇게나 주워 입어도 상관없었다. 여자는 회색 치마 스타킹에 자줏빛 스웨터를 입고, 전날 건조대 위에다 팽개쳐 둔 패딩을 껴입었다. 그리고 곧장 쪼그려 앉아 건조대 밑에서 흰 양말들을 주워들고 양말의 입속에 제 발을 집어넣었다. 양말을 다 신고서 여자는 이 원룸 안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인 코치 백을 어깨에 메고 어그부츠 속에 양 발을 쑤셔넣은 뒤 집을 나섰다. 바깥 공기가 퍽 쌀쌀했다. 원룸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지하철역에 다다랐을 때에야 여자는 협탁에다 휴대폰을 그대로 올려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장 에스컬레이터 위에 발을 올렸다. 에스컬레이터가 천천히 여자를 지하로 실어날랐다.
멀리서 내려다보면 알이 꽉 찬 순대처럼 통통하게 부풀어 있을 듯한 만원 열차 틈바구니에 끼어 일고여덟 정거장을 지나와서야 여자는 역에 내릴 수 있었다. 역사의 통로는 곧장 여자가 일하는 백화점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백화점은 아직 오픈 준비중이었는데, 입구에 선 경호원이 직원들은 안으로 들여보내고 손님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여자는 코치 백에서 사원증을 꺼내 경호원에게 보여주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홀이 퍽 을씨년스러웠다. 고객지원실의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백화점 직원들 중 여자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았다. 여자는 텅 빈 고객지원실의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고 점멸하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면서 일순 묘한 공허감을 느꼈는데, 그 감정은 형광등이 팟, 하고 켜짐과 동시에 금방 사그라들었다. 여자는 귀퉁이의 백룸으로 가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기 위해 곧장 캐비닛 앞에 쪼그려앉아 어그부츠를 벗었다. 부츠를 벗자마자 부츠 속에서 흰 양말이 쏙 빠져나왔다. 여자는 흐리멍덩한 백룸의 형광등 밑에서 잠깐 우두커니 그 흰 양말을 쳐다봤다. 어느덧 여자가 이 백화점에서 일을 시작한 지도 반년이 되어가는 참이었다. 백화점 일을 처음 시작하던 날, 여자는 사내의 복장 규정에 맞추어 시장통에서 싸구려 흰 양말들을 사왔다. 여러 면세점이나 백화점, 서비스직종들을 두루 전전했던 그녀지만 촌스럽게 흰 양말이 복장 규정이었던 곳은 없었다. 그 당시 당연히 정장 구두엔 검은 양말이지, 하고 생각해왔던 그녀로선 도통 이해가 안 가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양말 따위가 뭐 대수랴, 눈 깜짝할 새에 여자의 반년은 이 백화점과 함께 흘렀고, 요즘 여자는 거의 날마다 짝퉁 FILA 흰 양말만 신고 생활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직장을 옮길 때마다 항상 비슷한 패턴이었다. 여자는 직장에 자신의 삶을 끼워맞출 정도로 대체로 직장에 헌신적인 편이었으나, 매번 운이 따라주질 않았다. 계약직에서 정규직 전환을 앞둔 시점에서 회사가 감축 운영에 돌입하거나, 상사를 잘못 만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표를 쓰거나, 사내의 은따를 못 이겨 스스로 나가떨어지거나 하는 식으로 먼젓번 직장들에서 발을 뗐다. 여자는 특별히 자신이 모난 사람이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자신이 겪은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단지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사회란 늪에 발을 디딘 사람들 모두가 비등비등하게 겪는 불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나이 서른둘에 흰 양말을 신고 백화점의 말단 직원으로 출근하는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이유 같았다. 그것은 한편으로 타당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 자기기만이기도 했다. 여자는 무언갈 뒤로 감추듯 백화점 유니폼 정장 구두 속에 제 발을 밀어넣었다. 곧 나이어린 여직원 두어 명이 수다스럽게 백룸으로 들어와 여자에게 인사했다. 여자는 목례를 한 뒤 유니폼을 갈아입는 데 열중했다.

*

양말5는 푹신푹신한 여자의 어그부츠 안에서 생각했다. 양말1과 2, 3과 4, 5와 6, 7과 8, 9와 10이 각각 공장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짝지어졌던 서로의 파트너라고 한다면, 지금 여자의 반대쪽 어그부츠에 폭 파묻혀 있을 나머지 하나는 어쩌면 반 년 전 여자에 의해 헤어진 후로 만나지 못했던 양말5의 파트너, 양말6일지도 모른다. 아니, 오늘 아침에 영문없이 사라진 그 양말이 바로 양말6일 수도 있었다. 물론 사라진 양말이 무엇이든 간에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점에서, 양말5는 이제 영원히 양말6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양말5는 스스로의 몸과 정신이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말끔하게 세탁될 때마다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말5에겐 그렇게 세탁되고 난 후에 축축히 젖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면서 어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돌이켜보곤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이란 건 원체 그렇게 쓰잘 데 없이 흘러가는 것이어서, 어쩌면 당연한 순리처럼 잊혀져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양말5는 자신의 기억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잊혀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비교 대상으로 삼을 남이 없었으므로, 그냥 이게 사물의 이치겠지, 그냥 이렇게, 이런 속도로 잊혀지게끔 예정지워진 것이겠지, 하고 생각해버렸다. 그러면 그냥 마음이 편했다.
양말5는 방금 전, 빨래 건조대 밑의 양말들을 굽어보던 여자의 표정을 떠올렸다. 부연 화장으로 생기 없는 얼굴을 감춘 여자가 건조대 밑에서 흰 양말들을 골라 신었고, 여자에게 선택받은 양말5는 여자의 발을 입 안 가득 집어넣으면서 다소나마 안심했다. 아직 여자는 양말이 하나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당장은 위기를 모면했으나 이대로 가다간 분명 위기에 봉착하고 말 것이었다. 아홉 개의 양말 중 쓸모를 잃은 0.5켤레의 양말은 버려질 것이고, 언제든 그게 양말5가 될 수도 있었다.
여자는 늘 하던대로 백화점 백룸에서 어그부츠를 벗었는데, 그때 양말5는 여자와 잠시 눈을 맞췄다. 양말5의 눈은 발목 부근에 있는 FILA 상표의 F, 맨 위의 빨간 선분에 위치해 있었다. 한낱 양말인 자신에게도 눈이 있는 것으로 미뤄 아마 다른 사물들에게도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눈이 붙어 있을 거라고, 양말5는 짐작했다. 양말5는 인간이 흔히 말하는 오감 중 시각, 청각, 촉각을 갖고 있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보는 것은 눈을 통해서였지만 듣는 것과 느끼는 것은 몸 전체가 감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지 양말5에게만 국한되는 것일 수도, 모든 사물이 함께 공유하는 사물의 이치일 수도 있었다. 양말5는 모든 인간의 생김새가 제각각일 수 있어도 원초적인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몇몇 정황으로 단순화되어 결국 모두가 다 같은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듯, 사물을 논할 때도 이와 크게 다름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인간들이 입버릇처럼 흔히 내뱉는 말, 결국 다 같은 인간이야, 라는 말처럼, 양말5도 이렇게 말해볼 수 있었다. 결국 다 같은 사물이야. 양말5는 자신이 지극히 평범한 사물의 일종이길 바랐다.
여자는 발이 아픈 모양인지 한참을 발을 쳐다보며 주무르고 있다가 정장 구두에 발을 집어넣었다. 어그부츠와는 달리 목이 없는 정장 구두 속으로 들어가니 시야가 탁 트였다. 한참 조용하던 백룸은 친구 사이로 보이는 여직원 두어 명이 들이닥치자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여자는 겉도는 듯 보였다. 그들과는 대충 인사만 나눈 후에 말 한 마디 않고 유니폼으로 환복하더니 곧장 백룸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고객지원실을 벗어나 텅 빈 홀을 가로질러 자신의 담당 매장인 코치로 향했다. 여자의 발걸음에 맞추어 양말5는 텅 빈 홀을 타박타박 둘러보았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저들 중 몇이나 살아 있을 것인가. 저들 중 몇이나 자신처럼 눈을 뜨고 있을 것인가. 양말5는 문득 궁금해졌다.

*

여자는 오픈 준비를 했다. 매장의 불을 밝히고, 전날 판매된 물건들의 재고를 정리했다. DP 상태를 확인하고 선반의 먼지를 털었다. 금고의 시제 점검까지 끝마친 뒤에 카운터 뒤켠에 몸을 숨기듯 잠시 쪼그려앉았다. 간의 의자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여자는 하루종일 서 있어야 하는 판매직이나 서비스직만을 전전하다보니 오래 서 있는 것에는 이력이 나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오픈조로 출근을 한 탓인지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약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여자는 삼 분여 동안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섰다. 뒤이어 백화점 전체에 은은하게 이름 모를 클래식이 울려퍼지고,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화점 개방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었다. 오늘도 저희 백화점을 찾아주신 고객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자에겐 마치 그것이 전쟁을 선포하는 호각 소리처럼 느껴졌다.
번화가의 중심부에 위치한 백화점은 오픈과 동시에 밀물 밀려들듯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역에서 백화점을 경유해 거리로 나가려는 손님들이 대다수였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의 눈은 쇼윈도 너머의 가방들, 지갑들, 옷들, 향수들을 뒤적거렸다. 케이트 모스가 라인이 미끈한 코트를 걸치고 온몸으로 샤넬을 호소했고, 근육질의 베컴이 폭포수 밑에서 팬티 한 장 걸치고 캘빈 클라인을 호소했다. 여자는 코치 매장 쇼윈도 안쪽에 서서 백화점 1층 명품관에 가득 차 있는 수많은 상호들과 그 상호들 밑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치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듯 굽어봤다. 그때 문득 여자는 언젠가 보았던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렸는데, 그녀는 필시 <매트릭스>의 감독이 집 근처의 백화점 명품관을 거닐다 그 영화를 구상하게 됐으리라고 막연히 확신했다. 여자는 캐비닛 안에 넣어둔 자신의 신상 코치 백―직원 할인가 20% DC로 큰 맘 먹고 구입한―은 어떤 모양의 이진법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생각해봤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서 있는 코치 매장에 DP되어 있는 가방들 지갑들 등등의 세목들도 새롭게 눈에 띄었다. 여자는 <매트릭스>에서처럼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이 뭉그러지면서 일순간 사라지고 홀로 남는다면, 까맣게 꺼진 모니터 화면처럼 절대의 어둠 속에 그렇게 홀로 남는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마 뒤틀리는 기압차를 못 이겨 펑, 하고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당연히 여자는 펑, 하고 터져버릴 것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여자는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선택받은 1인이 아니었다. 재난 영화는 언제나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해일에 파묻히는 99.9%의 사람들은 외면한 채 0.1%의 선택받은 소수만 집중 조명한다. 여자는 재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간혹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영화 채널에서 재난 영화가 하고 있으면 그것을 잠시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정확히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긴 것이었는데, 그것은 CG 범벅 엉터리 재난에 마구잡이로 파묻히고 있는 99.9%의 인간들에 관한 생각이었다. 여자는 분명히 자신은 저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매트릭스>의 경우, 기계에 의해 에너지원으로 쥐어짜지고 있는 수십억의 인간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여기며 피식 웃곤 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알약을 집어먹고 거울에 손을 대자 거울이 네오에게로 주욱 딸려왔을 때, 네오의 태연한 표정을 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저딴 게 어딨어. 아마 여자는 빨간 알약을 먹는 순간 펑, 하고 터져버렸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자는 줄곧 이런 식의 공상에 사로잡혀서 간간히 매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인사하고 제품에 관해 물어오는 손님들을 응대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게 낯설어지고 우스워졌는데, 그런 감정이 그리 싫지 않았다. 99.9%의 대표적 표본인 여자―여자는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가, 또한 당연히 99.9%에 속해 있을 손님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러다보면 언젠가 0.1%의 선택받은 1인을 만나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글쎄, 그 선택받은 1인이 서울 시내의 백화점 명품관, 그 안의 코치 매장에 들어와 이진법으로 구성된 사물들에 관심을 가지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 여자는 99.9%의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마감조로 두 시간 늦게 출근한 직원이 매장에 들어섰고, 여자는 퍼뜩 공상을 접었다. 여자는 이제 막 출근한 마감조 여직원과 오 분만 지나도 전혀 기억나지 않을 쓰잘 데 없는 수다를 떨었고, 별로 궁금하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그 여직원의 이야기를 곰곰이 듣는 척했다. 그러다 손님이 갑자기 확 몰렸다. 여자는 정작 물건은 인터넷 구매 대행으로 살 거면서 오프라인 매장에 찾아와 조목조목 따져묻는 손님에게 친절히 제품을 설명했다. 가방 가격을 묻는 손님에게 친절히 대답해주고서 가격에 놀라지 않은 척하는 손님의 표정을 미소 띤 얼굴로 살폈다. 백만 원짜리 가방을 십이 개월 할부로 사는 손님과, 이백오십만 원짜리 가방을 일시불로 사는 손님을 맡아 계산했고, 가방 A/S를 맡기러 찾아온 손님을 친절히 응대했다. 어느덧 점심시간. 여자와 마감조 여직원은 교대로 고객지원실로 가 점심을 해결했다. 여자는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을 사다 먹었다. 여자는 그것을 다 먹고 다시 매장으로 돌아와 쇼윈도 안쪽에 우두커니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문득 잠잠하던 어지럼증이 다시 일었고, 여자는 카운터 밑 서랍에서 타이레놀을 꺼내 먹었다.

*

여자는 퇴근해 집에 돌아오자마자 양말5를 벗어 원룸 한복판에 팽개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자는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로 얼굴을 씻었다. 양말5는 원룸 한복판에 우스꽝스럽게 고꾸라진 채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화장실 문을 닫고 샤워기를 틀었다. 머리를 감을 모양인 듯했다. 양말5는 화장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곰곰이 들었다. 여자의 움직임에 맞춰 타일 바닥에 철퍽철퍽 떨어지는 물소리. 순간 양말5는, 비로소 아주 오랜만에, 조용해졌다고 생각했다. 기실 조용하다는 느낌은 여자의 원룸에 가만히 있을 때면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양말5에겐 항상 이 정적이 새롭고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바깥 세상은 양말5에겐 너무 시끄러웠다. 수도 없는 인간들과 온갖 사물들이 합심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소음이 범람하는 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조용한 곳은 어디일까.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인간들은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의 비유로 흔히 어머니의 양수 속을 들먹이곤 한다. 인간이 형성되던 순간, 그러니까 한 인간이 절대 기억할 수 없는 그 순간, 기억 이전의 순간이 은연중에 인간에겐 가장 조용하고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순간으로 인식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정적의 유토피아에서 퇴출되어 소음 천지의 세계로 내던져진 인간에게는 으레 양수 속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애초부터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들은 어머니의 양수 속처럼 조용하고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공간을 갈구한다. 어머니의 양수 속이 인간의 이데아라고 한다면, 집은 그 이데아의 모방인 것이다. 양말5는 여자에게 있어 이 원룸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봤다.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 생각은 곧 자신이 태어났던 순간에 관한 것으로 튀었는데, 양말5는 자신이 태어났던 공장에서의 기억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음을 알아채고, 그냥 모든 게 일찌감치 이렇게 예정지워진 거라고 언제나처럼 생각해버렸으나, 외로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문득 양말5는 결국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양말5는 생각할수록 사라져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죽어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생각하는 양말처럼 불분명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었다. 나는 양말5다. 나는 양말5다. 나는 양말5다. 양말5는 다시 되뇌었지만, 고작 자신이 양말5라는 사실이 무엇을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여자는 화장실 안에서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얼굴에 스킨, 로션, 수분크림을 차례대로 덧바른 뒤 아침에 협탁에 놓아두고 갔던 휴대폰을 손에 쥐고 침대에 누웠다. 여자는 두어 시간 남짓을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며 휴대폰 액정을 문지르다가 피곤해졌는지 불을 끄고 누웠다. 원룸 내부가 일순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오 분도 채 흐르지 않아 어둠 속에서 여자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코골이는 점점 고조되다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뚝 멎었다. 일 초마다 틱틱, 정적을 뒤흔들며 시계침이 바삐 움직였고, 양말5는 원룸 한복판에 우스꽝스럽게 고꾸라져 있었다. 자신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늘 여자의 반대편 발에 신겨져 있었던 또다른 양말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다. 양말5는 지금 저 또다른 양말이 기괴하게 뒤틀어진 자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이었고, 뒤이어 어쩌면 저 양말은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죽었는지도, 이미 정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다. 이 원룸 안의 모든 사물들이 이미 모조리 시체들이라면? 양말5가 마지막 생존자라면? 양말5는 이런 끔찍하고 무서운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으나, 막상 좀 더 생각해보니 그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저들은 모조리 영원한 타자였다. 전 생애를 통틀어 말 한번 섞지 못할. 그러므로 모든 사물들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양말5에겐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러다 양말5는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워졌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의 명문조차도 생각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고 설파하지는 않았다. 양말5는 지금 여기에 존재할 뿐이다. 양말5에게 있어 존재란, 바람 한번 훅 불면 까맣게 꺼지는 촛불처럼 위태롭고 덧없는 것이었다.
양말5는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시계침 소리를 들었다.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참을 죽은 듯 잠자던 여자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낡은 침대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때 침대 밑바닥에서 까만 형체가 기어나왔다. 인간의 손가락 한 마디만한 바퀴벌레였다. 여자는 간혹 원룸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면 꽥꽥 비명을 지르며 집에서 뛰쳐나가 가까운 거리에 사는 집주인 아줌마를 데리고 들어왔다. 집주인 아줌마는 능숙하게 잡지책 따위로 바퀴벌레를 내려쳐 잡고 별말 없이 원룸을 나섰다. 여자는 집주인 아줌마가 나가고 나면, 내가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좆같아서 진짜, 등등의 말을 중얼거리곤 했는데, 벌써 반년 째―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을 보면 그냥 별 생각 없이 홧김에 내뱉는 소리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어쨌든 여자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이 원룸에는 많은 벌레들이 살고 있었다. 양말5가 여자와 함께 살기 시작한 반년 전부터 바퀴벌레만 열댓 마리 이상이 나왔고, 괴상한 생김새의 나방들, 때론 거미나 지네까지도 출몰한 적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이렇게 여자가 잠든 밤이나 여자가 집을 비운 시간에 몰래 움직였다. 방금 전 침대 밑에서 나온 바퀴벌레는 곧장 원룸 한복판에 고꾸라져 있는 양말5를 지나쳐 어딘가로 뽈뽈 기어갔는데, 항상 저렇게 움직여서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좀 전에 여자가 몸을 뒤채면서 침대가 삐걱거리자 위기감을 느껴 다른 곳으로 피신하려는 것 같았다. 배고프면 먹고, 불안하면 도망치고, 안전한 곳을 찾으면 몇날 며칠이고 그곳에 가만히 붙어 있는 삶. 그것이 바퀴벌레의 삶이었다. 양말5는 원룸 한쪽 귀퉁이에 마련된 소담한 싱크대 밑의 틈으로 기어들어가는 바퀴벌레를 눈으로 좆으면서, 잠시 양말의 삶과 바퀴벌레의 삶을 견주어보았다. 특별히 어느 것이 더 나은 삶인지 특정짓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양말이나 바퀴벌레보다 더 나은 삶을 여자가 살고 있느냐고 생각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전에, 다른 이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일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는데 그것도 석연치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이전에, 과연 양말의 삶을 삶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의문스러웠다. 양말5는 지금 생각하고 있고, 고로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사물에겐 애초부터 삶이란 게 주어지지 않았던 건 아닌가. 그러다 양말5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것은 저주다. 삶이 없는 사물에게 생각이 주어진 것. 그래서 하필이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된 것. 이것은 저주다.
나는 양말5다. 나는 양말5다. 나는 양말5다.
이것은 저주다.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양말5는 어느 날 아침, 영문없이 사라진 양말 한 짝에 관해 생각했다. 그 양말은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왜 사라졌을까. 양말5는 방금 자신이 한 생각이 굉장히 웃기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사라졌겠어? 왜 사라졌겠어? 당연한 걸 가지고.
양말5는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시계침 소리를 들었다. 양말5는 졸렸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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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잠에서 깼다. 모처럼의 비번이었다. 여자는 침대 위에서 허리를 옹송그리고 가만히 앉은 채로 원룸 안을 휘 둘러보았다. 어제 퇴근하고 와서 빨래 건조대 위에다 훌렁훌렁 벗어두었던 옷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여자는 부스스 일어나서 빨래 건조대 쪽으로 몇 걸음 걸었다. 그때 발치에서 양말이 채였다. 여자는 흰 양말들을 주워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실의 움푹한 공간에 놓인 세탁기 안에 던져넣었다. 빨랫감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여자는 오늘은 꼭 빨래를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여자는 어제 출퇴근 때 입었던 차림 그대로 집을 나와 시장으로 갔다. 시장에 있는 할인마트에서 우유와 씨리얼, 주스, 햇반, 각종 레토르트 식품들을 샀다. 떡볶이와 순대가 먹고 싶어져서 근처 아딸에 들러 일 인분씩을 포장했다. 여자는 다시 원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장을 벗어나는 길목에 허름한 속옷 가게가 있었다. 여자는 별 생각 없이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좌판을 내려다봤다. 흰 양말이 잔뜩 쌓여 있었다. 좀 더 살 때가 됐지. 여자는 생각했다. 흰 양말 다섯 켤레 주세요. 여자가 말했다. 가게 안쪽에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던 할머니가 뒤뚱뒤뚱 걸어나와 짝퉁 FILA 흰 양말 다섯 켤레를 까만 봉지에 담아 건넸다. 여자가 오천 원을 건네자 할머니가 도리질했다. 한 켤레에 천이백 원이야. 여자는 천 원을 더 건네고 봉지를 받아들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자는 장 봐온 비닐 봉지들을 한 켠에 던져두고 책상(겸 화장대 겸 식탁)에 앉아 떡볶이와 순대를 먹었다. 한 손으론 휴대폰을 쉴새없이 만졌다. 여자는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가득한 웃긴 사진들과 동영상들을 실실거리며 훑었다. 떡볶이와 순대를 다 먹고 나서 여자는 일회용 그릇들을 겹쳐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장 봐온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레토르트 식품들을 싱크대 찬장에 쌓아놓고 마실 것들은 냉장고 안에 가지런히 놓았다. 씨리얼을 일회분씩 나눠담을 수 있는 그릇에 200g씩을 나눠서 넣고 나머지는 둘둘 말아 찬장에 넣었다. 그리고 까만 봉지에서 양말들을 꺼내 켤레마다 묶여 있는 스테이플러를 뜯었다. 여자는 열 개의 새 양말들을 손에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빨래 건조대 밑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반 년 넘게 신어 거뭇거뭇해진 흰 양말들 사이에서 새 양말들은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여자는 하품을 하고 겉옷을 벗어 침대 위에다 던졌다. 화장실에서 세탁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려퍼졌다. 여자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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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아침, 양말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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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길을 걷다 문득 멈춰섰다. 어그 부츠에서 발을 빼내어 구석구석을 긁었다. 다시 부츠를 신으면서, 여자는 핸드폰 시계를 들여다봤다. 지하철 시간이 머지않았다. 여자는 곧장 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제34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당선소감


밥을 먹었다. 식사는 길어야 십 분쯤? 배가 불러 수저를 내려놓았다.
우두커니 밥그릇을 쳐다봤다. 몇 알의 밥풀이 아직 거기 남아 있었다. 밥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물을 틀었다. 여남은 밥풀이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
개수대 구멍으로 빨려들어간 밥풀들의 여행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밥풀들은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제 지난날을 회고하기 시작할 것이다. 처음으로 세상에 잉태되던 순간, 영글어 수확되던 순간, 포대 자루에 나뉘어 담아지던 순간, 밥솥에서 취사되던 순간들 따위의.
이미 나는 배불렀으므로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한 밥풀들. 내 뱃속보단 차라리 저쪽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물을 잠그고 뒤돌아섰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 년 뒤에 <양말>을 썼다. 이젠 이 세상에 어떤 형체로도 남아 있지 않을 그 밥풀들에게 이 소설을 바치고 싶다.
부족한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박성원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항상 내 삶에 파란을 일으키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들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묵묵히, 살아가며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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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추천해주세요] 모든 존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에게,  ‘어머니와 나’ 오늘도 밥은 제때 먹었는지, 수업에서 ‘예시’를 들어 쉽게 설명했는지 물으시는 아빠께 툴툴거렸다. 당신 딸의 나이가 별로 실감나지 않으시는 눈치다. 사실, 저 안에 담긴 아빠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 놓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나 같은 학생들이 많으리라. 이 책은 어느 이름 모를 여사님의 일상 목소리를 기록한 것이다. 대화의 상대이자, 책의 저자인 김성우는 바로 그녀의 아들. 70대 초반쯤 되셨을 법한 여사님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상황-거창한 시대적 사건부터 천 원에 산 감자 이야기까지-에 대한 단상들을 꾸밈없는 잔잔한 언어로 들려준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다 보면 모든 이야기가 편편이 분절된 것이 아닌, 세월만큼 깊어진 그녀의 너그러운 지혜로 꿰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한 여인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구술사이자 그녀의 에세이요, 삶에 대한 성찰을 담은 철학서인 것이다. 문학과 철학의 언어는 때로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는 별 관련 없는, 재주 많은 이들의 영역인양 느껴지기도 한다. 리터러시 연구자로서 문자 자체에 대한 이해력을 넘어 삶이 스며있는 소통에 대해 이야기 해 온 저자는 “나의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