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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그 정신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몇 년 전 5월 18일 무렵 대구를 찾은 적이 있다. 택시를 타고 기사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5·18에 대한 말을 듣게 되었다. 한 마디로 폭도들의 난동을 왜 나라에서 보상이니 뭐니 하느냐는 것이었다. 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고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5·18을 민주화 운동이 아닌 광주사태 쯤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 이같은 인식의 괴리는 아마도 30주년을 맞는 5·18을 기리기 위한 국가 기념식이 파행으로 끝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5·18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거나 광주라는 특정 지역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는가에 문제로 귀결된다. 1979년 10월 16일 박정희 유신독재의 마감을 이끌어냈던 부마항쟁이 부산·마산 지역의 문제가 아니듯 5·18 역시 특정 지역의 문제일 수 없다. 민주화 운동이 특정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된 것은 민주주의의 부재 또는 위기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그 지역에서 좀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이 부마항쟁 발발의 한 계기가 되었듯이 김대중의 구속이 광주를 자극했던 계기가 되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독재의 정점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함으로써 독재권력의 공백 상태가 된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민주주주의가 확대될 수 있는 전망이 갑작스럽게 열린 것이다. 민주화의 기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헌법개정과 이에 따른 민간정부 선출이라는 민주화 이행 일정이 조속하게 진척되어야 했다. 그러나 ‘서울의 봄’ 시기에 이 같은 민주화 일정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컸지만, 정부 내 유신체제 잔존 세력들은 민주화 일정을 늦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79년 12·12군사반란을 통해 군 내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신군부세력 역시 민주화 일정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1980년 4월과 5월 초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어 민주화 이행을 촉구했지만 결국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12·12군사반란을 통해 군 내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신군부세력이 1980년 5월 17일 쿠데타를 통해 그것을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80년 5월은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는데 왜 하필 광주에서만 민중항쟁으로 번져나갔을까? 당시 서울 등 타지역에서도 만약 계엄령 같은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물러서지 않고 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행동에 옮기려 했었다. 그러나 5월 17일 막상 계엄령이 떨어지자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본격적인 시위가 진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민주화 성회’를 통해 민주화 열기를 결집했던 광주에서는 비상사태가 나오더라도 다시 모이자는 약속을 지켰다.

5월 18일 전남대 교문에서는 학생들이 전날 약속대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의 진압에도 금남로까지 진출하여 항쟁의 길을 열었다. 전두환 등 신군부는 김대중을 구속하면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될 것을 예상하고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이 도시에 사전에 배치했다. 18일 시위가 벌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들 공수부대는 시위대와 일반 시민들을 살상용 곤봉과 대검으로 진압해 초기에 완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이같은 야만적 만행이 광주 시민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넘어 공동체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저항에 떨쳐 일어나게 했고 폭발적인 항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열흘간의 항쟁 기간 동안 특별한 지도자나 지휘부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사태가 전개되면서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항쟁의 전 과정을 지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장례, 홍보, 차량통제 등등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지역 전체의 질서가 유지되었으며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었다. 철저하게 고립된 광주는 오히려 스스로의 생명과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과정에서 자발성과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민중적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었다.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이 줄을 이었고, 식량과 생필품을 서로 나누었으며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항쟁 10일 동안 ‘자치공동체’를 이룩했던 ‘해방광주’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름지워진 광주지역의 민중항쟁은 막대한 희생자-2001년 12월 정부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민간인 168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195명이 희생되었고 4,782명이 부상을 당했다. 행방불명으로 신고 된 자가 406명인데 정부에서는 이 중 70여명만 인정하고 있다-를 남기며 좌절되었다.

5·18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참담하게 마무리되었다. 진실은 은폐되었으며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철저한 정치적 패배란 사실은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5·18’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전개되었으며, 결국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5·18은 무엇보다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우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깨어 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잡았다.

5·18 시기의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정신은 민주주의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 전범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압제에 저항하는 세계 민중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5·18은 아시아 지역의 민주화 운동과 세계 민주화 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저항으로 분출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이후 1986년 필리핀의 ‘민중혁명’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이듬해 한국의 6월 항쟁으로 파급되기도 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아시아와 남미를 중심으로 민주화의 바람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분단이라는 냉전의 최전선에서 강력한 군사독재를 유지하고 있었던 한국이 민주주의로 이행함으로써 희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완성형이 없다.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끝없는 도전의 과정인 것이다. 5·18 정신은 이같은 도전 속에서만 온전히 기억될 수 있다. 5·18은 사건 그 자체로도 온전히 기억되고 전승되어야 하지만 그 정신이 오늘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고 많은 한계도 있지만 현재는 30년 전과 같은 처절한 투쟁의 시대는 아니다. 낮은 곳을 향한 연대의 시선을 놓지 않고, 스스로 참여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를 방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곧 5·18 정신의 진정한 계승이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