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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에서 세계적인 공연문화로

비보이를 말하다


1970년대 말 뉴욕 뒷골목. 경제 불황을 피해 먹고 살려고 남미에서 불법 이민을 온 청년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뒷골목을 장악하고 있던 흑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밤낮으로 세력다툼이 이루어졌고 총격전이 빈번했다. 이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이때 그들은 브레이크댄스를 할 때는 서로 공격을 하지 않기로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화나는 일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휴전을 맺은 상태.

이때 그들은 상대 쪽에 가서 고난도 테크닉의 브레이크 댄스를 보여주어 기를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 다시 위압당한 쪽은 부지런히 연습을 해서 복수를 했다. 이렇게 죽자 사자 연습을 하게 되었고, 전투의 승리를 취하듯이 대결하는 사이 그들의 기량과 테크닉은 놀랍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브레이크 댄스 대결을 배틀(전투)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다.

그때 사회 주류에서는 뒷골목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문화로 이 힙합, 비보이 문화를 꼽고 있다. 부랑아, 불량 청소년들의 쓸데없는 문화취급을 받았지만 그것이 세계적인 공연문화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당연히 비보이(B-boy)는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남자이고, 여성은 비걸(B-girl)이라고 한다. 원래는 클럽의 DJ가 음악을 틀다가 브레이크(Break 노래 중간에 비트만 나오는 구간) 부분을 계속해서 들려줄 때, 이에 맞게 맞춰 플로어에 나와서 춤을 추는 남자를 비보이라 했다. 한국에 알려진 것은 80년대부터다. 주한미군방송(AFKN 현 AFN)을 통해서였고 비보이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음반과 비디오테이프, 해외 거주 경험자 등이 전파 매개체 역할을 했다. 80~90년대 초반까지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고 비보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길거리에서 춤추는 이들, '스트리트댄서'라고 했다.

97년 '익스프레션'이 결성되면서 비보이라는 용어가 전파됐다. 몇 년 사이 한국 비보이들이 세계 4대 비보이 배틀인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 영국 'UK 비보이 챔피언십', 미국 '프리스타일 세션', 국가를 옮기면서 개최되는 '레드불 BC ONE'에서 우승해 왔다.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비보이는 약 3000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10여개 팀 100명 정도는 어떤 국제대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들의 춤동작 비디오는 해외에서도 교과서로 간주된다. 비디오 게임 모델로 채택되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한국에 오는 비보이가 늘고 있다. 유럽에선 한국이 불참하면 대회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다. 비보이팀 '갬블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전야제에서 단독 공연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국내 비보이들의 신체조건은 결코 비보잉을 하기에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왜 한국의 비보이는 이렇게 강하게 된 건가?


일단 비보이는 세계 공연화두인 비언어퍼포먼스(Non Verbal Performance)에 잘 맞는다. 세계적으로 몸을 매개로 표현하는 공연이 각광받고 있다. 이는 <난타>, <판토마임>, <점프>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의 세계적 수준의 초고속 인터넷 망도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어떤 기술은 A선배, 또 다른 기술은 B선배에게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배워야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학생도 동영상 교본을 다운받아서 쉽게 연습을 할 수 있다. 다른 국가는 동영상을 보기에는 난처한 속도다. 여기에 집단적인 문화 성향도 꼽는다. 개인 기량은 외국 비보이들이 뛰어나지만, 여러 명이 하는 집단적인 조화에서는 한국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반항이 맹렬한 비보이 문화를 만들어 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체적이고 획일적인 문화가 강할수록 자기표현의 문화인 비보이 문화가 발달한다는 말이다.


마당놀이, 마당정신, 광장문화와 정신이 이어진 측면도 있다. 브레이크 댄스는 큰 공연장이 아니라 작은 공간, 뒷골목이어도 공연이 가능하다. 마당놀이 같이 길거리든, 시장 바닥이든 공연공간이 되고 그들의 무대가 된다.

군대가 비보이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한국의 비보이들에게 커다란 벽이 군 입대다. 입대 전까지라는 한정된 시간에 최고 기량을 쌓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연습에 쏟는다. 운동선수와 연예인과는 달리 군입대해도 특기를 살릴 길이 현재는 없다.


갈 길은 멀다. 비보이들은 아직도 '노는 젊은이'들쯤으로 대접받고 있다. 사회는 여전히 하나의 독립된 문화장르로 인정하지 않아 브레이크 댄스가 발레나 재즈처럼 예술의 한 장르라고 보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비보이의 정신은 평화와 안식을 절실하게 갈망하는 이들의 꿈이 배어 있다. 폭력과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된 삶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마음이 비보이 문화에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은 기교만 있고 정신은 없어진 것은 아닌가.


비보이 정신은 주체적인 문화 창조자 측면이 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몸을 통한 정신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그럴듯한 공연무대가 아니라 뒷골목,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이 무대이고 세상의 중심이라는 정신이 있다.

지금은 상업적인 목적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일정한 형식화 규격화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그래도 다행이다. 상업주의의 유혹이 집요한 만큼 언더그라운드에 남아 그 정신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있기 때문이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