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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교수의 세계ㆍ지방화 시대의 한국학 제4회 10강 요약

사단 칠성론ㆍ인심도심론ㆍ인심선악론ㆍ살생선악론의 근거논란

四端七情論


이황은 사람이 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며, 사람의 마음에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다고 말했다.


악한 마음을 누르고 선한 마음을 키워 세상을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근본이 되는 작업을 했다. 선한 마음은 四端이라고 하고, 악한 마음은 七情이라고 한다.


사단은 (孟子)에 나오는 惻隱ㆍ羞惡ㆍ辭讓ㆍ是非의 마음이다. 가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고, 사양하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다. 그 넷이 각기 仁ㆍ義ㆍ禮ㆍ智의 端이라고 했다. 칠정이란 (禮記)에서 말한 喜ㆍ怒ㆍ哀ㆍ懼ㆍ愛ㆍ惡ㆍ欲이다.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마음이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의 관계를 따지는 이론의 틀은 理氣철학이다. 논리 정연한 체계를 갖추고 천지만물의 이치를 다 밝히고자 했으나 미비점이 있어 논란이 거듭되었다.


四端은 理先氣後이고, 七情은 氣先理後이다. 理先氣後에서는 氣가 理를 따르고, 氣先理後에서七情은 理가 氣를 탄다. 이렇게 되니 四端과 七情은 만날 길이 없다. 출처가 다르고 지향점이 같지 않다.


人心道心論


四端과 七情을 열거할 때에는 선한 마음인 사단을 먼저 들고 악한 마음인 칠정을 나중에 들지만, 인심과 도심은 그렇지 않다. 원래부터 人心을 먼저 들고 道心을 나중 들었으며, 그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도심과 인심은 氣가 발해 생기는 마음인 점에서 같지만, 도심은 도의를 위하고, 인심은 입과 몸을 위한다고 했다. ‘위한다’는 것을 원문에서 ‘段’이라고 하고 번역에서는 “단서”라고 했다. 그 말을 ‘동기’라고 풀이해, 마음을 내는 동기가 둘이라고 할 수 있다. ‘지향점’이라고 하는 것이 한층 적극적인 해석이다.


“단서”나 “동기”보다 “지향점”이 더 나은 것은 지속성을 문제 삼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단서”나 “동기”는 쉽사리 버릴 수 있지만 “지향점”은 그렇지 않다. 도의를 위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해서 생겨난 도심은 계속 도심이기만 하고, 입과 몸을 위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해서 생겨난 인심 또한 계속 인심이기만 한가? 이것이 문제이다.


“인심도 도심이 된다”고 한 것이 그 말이다. 처음에는 인심이었던 마음이 나중에는 도심으로 바뀔 수 있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사단칠정론과 다른 인심도심론의 지론이 완성된다. 동기가 아닌 결과가 평가의 대상이다. 동기는 확인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결과는 명백하다.
人心善惡論
尹鳳九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이이의 학통을 이은 후계자들 사이에서 人物性同異 논쟁이 일어났을 때 人物性異論에 가담했다고 하면서 거론된다. 人物性異論이라고 하는 것은 人物性因氣異論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氣의 구체적인 양상에 입각해 이해하면서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중요시하자고 했다.


윤봉구는 그런 관점에서 人心道心을 재론했다. 이이의 견해를 그대로 이은 것 같으나,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음식이나 남녀를 예로 들어 말한다면, 음식이나 남녀를 위해 생기는 마음이 理에 합당하면 그것은 人心 가운데 선한 것이다. 어째서 道心이라고 불려야 하겠는가? 만약 人心가운데 선한 것은 道心이라고 한다면, 人心은 다만 악한 쪽이기만 하니, 그래서 되겠는가?


이이가 “口體”라고 한 것을 “飮食男女”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먹고 살면서 남녀관계를 가지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런 것들을 위하는 인심은 나쁜 마음이라고 한 이이의 견해를 윤봉구는 이었다.


이이는 “도심으로 절제해 인심은 줄곧 도심의 명령을 듣도록 하면, 인심도 도심이 된다”고 했다. 윤봉구는 “음식이나 남녀를 위해 생기는 마음이 理에 합당하면 그것은 人心 가운데 선한 것이다”라고 하고, “어째서 道心이라고 불려야 하겠는가”라고 했다.


이이는 인심이 선한 마음일 수 없고, 도심을 따르면 도심이 된다고 했다. 윤봉구가 인심이 "理에 합당하면"라고 한 理는 자체에 있는 것이고 도심의 道에서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인심이 도심이 되지 않고, 그 자체로 선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人物性因氣異論의 견해이다. 이이는 인심이 악하고 도심은 선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윤봉구는 인심은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고 했다. 이이가 세운 체계를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이이는 선한 마음이 도심뿐이라고 했다. 윤봉구는 선한 마음이 인심에도 있고, 도심에도 있다고 했다. 그 둘은 사단과 칠정처럼 별개의 것이 아니고 다 같은 心이다. 그렇다면 인심에 선한 마음이 있는데 도심의 선한 마음이 왜 따로 있다고 해야 하는가? 의문이 제기된다.


도심의 착한 마음은 도의를 지향점으로 했으니 음식이나 남녀를 지향점으로 한 인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음식이나 남녀라는 말로 집약해 나타낸 현실적인 삶을 그 자체의 도의에 맞게 영위하는 것이 마땅하지 도의를 별개의 것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의문을 다시 제기할 수 있다.


生殺善惡論


음식이나 남녀라는 말로 집약해 나타낸 현실적인 삶을 그 자체의 도의에 맞게 영위하는 것이 선이다. 이미 제기되어 있는 이런 견해가 任聖周, 洪大容, 朴趾源 등이 나타나 人物性因氣同論을 이룩하자 분명해졌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氣로 이루어지고 氣의 작용인 삶을 누리는 것은 마찬가지고, 삶을 누리는 것 자체가 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인가? 삶을 누리는 것이 선이므로 삶을 유린하는 것이 악이다. 삶을 누리는 것이 선이고 삶을 유린하는 것이 악이라고 하는 견해이니 生殺善惡論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범이 사람을 나무라면서 한 말이다. “무릇 자기 것이 아닌데 취하면 盜라고 하고, 삶을 유린하고 物을 해치면 賊이라고 한다. 너희는 밤낮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라리고 빼앗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심한 자는 돈을 형님이라고 한다. 그러니 윤리 도덕을 다시 논할 수 없다.”


“殘生而害物”이라고 한 구절에서 “殘”과 “害”는 죽이고 해친다는 말이다. “生”은 사람이고 “物”은 동물이다. 人物性同異를 말할 때의 “人+物”과 같다. 동물을 함부로 죽이는 것도 악이라고 했다. 맹수는 먹기 위해 필요할 때 다른 동물을 죽이는데, 사람은 죽이는 것 자체를 즐기니 용서할 수 없다고 나무랐다. 더 큰 악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해치고 빼앗는 것이다. 그래서 생기는 사회악이 가장 큰 악이다.


활용방안 1


사단칠정론ㆍ인심도심론ㆍ인심선악론ㆍ살생선악론은 문학작품에 나타난다. 이 넷을 작품이해의 방법으로, 문학사 서술의 얼개로 삼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사단칠정론은 선악이 미리 정해져 있어 평행선을 달리기나 하고 서로 얽히지는 않는다고 하므로, 서정이나 교술 작품에 나타난다. 시조는 사단에서 나왔다는 것과 칠정에서 나왔다는 것이 서로 대조가 된다.


인심도심론은 선악을 대조해 다룬 작품에 두루 보인다. 선인과 악인의 대결로 진행되는 소설이 좋은 본보기이다. 선악 구분의 기준은 별도로 설정된 도의이다. ‘조웅전’ 등의 영웅소설이 모두 이런 작품이다.


인심선악론은 도의의 실현자라고 평가할 것 없는 사람들이 나날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에 널리 보인다. 자기 몸을 위하려고 하는 마음이라도 그 자체의 도의에 합당하면 선하다고 하는 지론은 남녀의 결연을 다채롭고 흥미롭게 그리는 소설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서정이나 교술의 생살선악론 작품은 사단칠정론에 반론을 제기한다. 기질지성의 시조라고 한 것들이나 사설시조가 그런 것들이다. 삶을 누리는 것이 선이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을 유린하는 것이 악이라고 선언하고 투쟁하는 가사, 판소리, 소설, 탈춤 등도 있다.


활용방안 2


사단칠정론ㆍ인심도심론ㆍ인심선악론ㆍ살생선악론은 사람의 행위를 평가하는 데 직접 활용된다. 사람의 행위를 평가하는 여러 과제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항일하거나 친일한 행적을 가려내는 것이 특히 긴요한 과제이다. 항일은 선이고, 친일은 악이라고 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항일과 친일을 갈라놓고 등급을 나누기까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가의 척도로 삼는 선악관이 있어야 한다. 망국의 소식을 듣고 자결한 사람이 가장 고결하다. 의병을 일으키면서 승패는 생각하지 말자고 한 것이 옳다. 항일의 동기를 분명하게 하고 민족 지도자로 나선다고 하다가 친일로 기울어진 사람이 적지 않다. 동기가 아닌 결과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결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
인심선악론은 항일도 친일도 하지 못한 만백성의 경우를 다룰 수 있게 한다. 항일을 위해 떨쳐나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두드러지게 친일을 한 것도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사단칠정론을 가지고 논하면 일제가 시키는 대로 따른 잘못이 있으니 용서할 수 없다.


인심도심론에서는 복종을 상쇄할 만한 항거의 공적이 있는가 묻는다. 인심선악론은 일해서 밥 먹고 자식 낳아 기르면서 산 것이 그 자체의 도의에 합당하면 평가해야 한다는 수정안을 제출한다.


살생선악론은 삶을 누리는 것이 선이라고 하므로 밥 먹고 자식 낳아 기르면서 산 것 그 자체를 평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인심도심론은 동기에 머무르지 않고 결과를 소중하게 여겨 선악 판별 대의 적용에 신축성을 가진다.


인심선악론은 선악의 극단론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연다.


생살선악론은 선악 판단의 근거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사회윤리를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