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는 비록 간요(簡要)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한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25년’
인간이 발견한 혹은 발명한 지식의 산물 중에서 가장 으뜸은 무엇일까? 인간의 문명 발달에 가장 많이 기여한 것은 무엇일까?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고 그것을 축적하여 수도 없는 산물을 창조하여 인류 발달을 이루어왔다. 그 가운데서 하나를 꼽는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문자’ 발명이라는 답변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문자는 지식을 축적하고 전달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도구이자 인간이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자의 발명은 인간의 문명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 문자는 인간이 타고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부단한 노력이 있지 않으면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옛날,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던 시절에 우리 선조들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고유 명사부터 문장 전체를 표기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여 이두, 구결, 향찰의 문자 표기를 고안하게 되었고,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우리 고유의 문자인 훈민정음이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 25년(1443)년에 완성되었다.
훈민정음을 완성한 후 3년 뒤에 집현전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책 ’훈민정음’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책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 창제 배경, 창제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훈민정음이 어떻게 창제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세계 문자사에서 문자 발명의 과정이나 원리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문자로서 훈민정음의 찬사는 끊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훈민정음의 과학성, 합리성, 체계성이다.
“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모양을 본뜨고 ...... ㅋ은 ㄱ에 비하여 소리 나는 것이 조금 센 까닭으로 획을 더하였다.”
‘훈민정음’
위 내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자 훈민정음은 발음 기관을 본떠 기본 글자를 만들고 그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 계열의 글자를 나타내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문자 창제 과정이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모든 음성은 고유한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음운 특성은 언어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음성의 발견은 언어를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음성의 과학적 분석이 훈민정음의 창제에 반영된 것으로 문자사 발달에 매우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아가 언어학자들은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은 음성의 변별 자질이기 때문에 훈민정음은 세계 문자사에 유래 없는 자질문자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ㅋ은 ㄱ에 획을 더하여 창제하는 방식 또한 세계 언어학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이다. ㅋ은 ㄱ과 조음 위치가 동일한데 이 조음 위치를 감안하여 ㄱ에 획을 더하여 ㅋ을 창제한 것이다. ㄷ이나 ㅌ도, ㅂ이나 ㅍ도, ㅈ이나 ㅊ도 각각 ㄴ, ㅁ, ㅅ에 획을 더하여 창제하였는데, 이와 같은 방식처럼 음성학적으로 동일한 위치에서 소리 나는 글자를 기본자에 획을 더하여 창제한 원리는 훈민정음이 음성학적으로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세계 문자 발달사에서 이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문자의 발생 혹은 그 과정은 그림을 간략화하거나 추상화하여 단어 문자가 만들어지고, 문자에 음성이 병행되면서 의미 부분이 빠진 음절 문자가 만들어지고 이후 음소를 중심으로 표기하는 음소 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음소 문자는 언어의 음소를 중심으로 문자를 만들어 문자를 단순화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문자 발달사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문자 발달에 비추어 볼 때 훈민정음은 음소 문자에 해당된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음소들의 관계와 조음방식, 조음위치가 문자 체계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음소 문자보다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훈민정음의 문자사적 특징을 정리하면, 훈민정음은 문자 창제자, 창제 시기를 알 수 있는 문자이고, 기본 문자에 가획하는 방식의 문자이며 조음방식과 조음위치가 반영된 문자이다. 또한 음소 문자로서 음소 단위를 표기하되 음절을 모아 표기하는 문자이다. 이와 같은 훈민정음의 특징은 훈민정음만이 지닌 것으로서 매우 획기적인 문자라 하겠다.
훈민정음은 세계 어디에서나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이자 우리나라의 문화를 한 단계, 아니 그 이상의 단계로 끌어올린 최고의 발명품이다. 국어사 강의 시간에 간혹 우리 학생들에게 만약 훈민정음이 창제되지 않았고 아직도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필자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도, 사실 상상하기도 생각하기도 싫다. 우리 문자 훈민정음이 없는 우리나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