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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편지] 일 없는 그 일말고는 다시는 더 일 없는 날

일 없는 그 일 말고는 다시는 더 일 없는 날

“아무리 살아봤자 나는 20년을 더 살 수 없고, 아무리 살아봤자 이 선생도 또한 50년 이상을 더 살 수는 없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쁘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봄날이 다 가도록 놀러도 한번 오지 않느냐? 이런 속도로 만나다가는 앞으로 열 번인들 더 만나겠느냐?”

구름 형! 며칠 전 저는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꿈틀, 북받쳐서 북쪽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흰 구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촉급한 논문 때문에, 세계와 인간에게 이렇다할 도움이 되지도 않는 각종 세미나와 소모적인 행사 때문에, 재우쳐 달려가지 못하고 있는 터에, 이번에는 격진령(隔塵嶺) 너머 눌운재(訥雲齋)로부터 구름 형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면서 건너가는 날엔, 배낭 속에 떡밥 한 덩이 넣은 뒤에 낚싯대 하나 메고 어은동(魚隱洞) 뒷산으로 올라가서 붕어 낚시라도 한다면 아마도 저물녘엔 일찍 뜬 초승달이라도 하나 걸려들 것 같습니다....”

구름 형과 함께 낚싯대를 들고 어은동 뒷산으로 올라가서 각시붕어 대신에 일찍 뜬 초승달을 낚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세속적 속물근성이 지배하는 홍진세계 그 너머에 있고, 구름조차도 오로지 어눌(語訥)한 구름들만 떠돌고 있으니, 그곳에 가면 어떤 시원적인 평화가 밀물처럼 밀려올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발등에는 이미 오줌으로 간단히 끌 수는 없는 큰 불덩이가 여러 개 한꺼번에 떨어져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구름 형! 나의 생애에도 일 없는 그 일 말고는 다시는 더 일이 없어, 달팽이 한 마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왼 뿔 누르는 순간 솟아나는 오른 뿔의, 손에 닿지도 않는 그 촉감을 만져볼, 그런 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엄청 심심한 날 무지개 뜬 저녁 답에, 수리 못 도라지 밭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새하얀 꽃봉오리를 보러 갈 때 형에게 편지 보내겠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 옆 더더욱 더 탱탱 부푼 실로 무수한 봉오리 중에서 보라 빛 꽃도 골라, 하나씩 톡, 톡, 터, 뜨, 려, 죄라도 좀 짓고 싶은 날이 오면, 죄를 짓더라도 이왕이면 형과 함께 짓고 싶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