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제일교회와 동산병원 동편에는 언덕길로 된 긴 골목길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계산성당 쪽에서 서쪽 계성학교 방향으로 연결되는 계단길이다.누군가 이 길을 현제명이 다닌 길이라고 하여 ‘현제명의 언덕길’로 부르기도 하였고, 3·1 독립만세 운동을 할 때 계성, 신명학생들이 모여 지나갔던 길이라 하여 ‘삼일 운동로’라는 팻말을 써 붙여두고 있다.‘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눈물만 흐른다……’로 시작되는 현제명 작사 작곡의 ‘고향생각’은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시카고에 유학을 마치고 초대 서울대 음대학장을 역임하는 등 해방 후 초창기 한국 음악계를 이끌던 분이었다. 그 자신이 테너 성악가였던 만큼 그의 역량이 보이는 곡은 ‘산들바람’, ‘희망이 나라로’, ‘그 집앞’ 등이 많이 불리어진다. 그의 흉상 제막을 앞두고 그의 친일행각을 문제삼는 분들에 의해 그 제막 행사는 안타깝게도 유보되었다고 한다. 대구가 낳은 또 한 분의 음악가로 박태준 선생을 들고 싶다. 그는 1900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역시 계성, 평양 숭실 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웨스터민스터
계성, 신명을 다니신 분들은 계성학교 교가의 한 구절 ‘앞에 섰는 것 비슬산 이요 뒤에는 팔공산 둘렀다……’의 가사를 바꾸어 ‘앞에 섰는 것 신명학교요. 뒤에는 서문시장 둘렀다……’로 바꾸어 부르곤 했던 추억이 있을 줄 안다.서문시장은 또한 동산병원과 이웃하여 있으므로 전국의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와 닿게 하였다. 동산병원에 진찰 받으러 오는 길에 서문시장에 가서 장도 보는 식이다.서문시장 자리는 큰 못이 있던 곳이다. 못을 메운 터에 시장이 들어선 셈이다. 서문시장은 원래 대구읍성과 동서남북 성문이 있던 시절엔 북문 부근(지금 동산파출소)에 있던 것이 조선 중기 현종 10년(1669년) 행정권이 확장되어 경상감영(현재 중앙공원)이 설치되면서 교역량이 늘고 상권이 확장됨에 따라 협소해진 시장을 서문 쪽으로 이전하게 되어 서문시장이 되었다 한다.서문시장은 한때 대구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였으나 1970년대를 고비로 현대화 및 백화점 쇼핑 선호의 물결에 밀려 점차 위축되어온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소방도로 확장, 소방서 설립 및 환경을 크게 개선시키고 상점 주인들의 세대교차가 일어나면서 다시 부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서문시장은 몇 차례의 대화재가 발생
늦가을이다. 주택가를 거닐다 보면 어느 집에선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요즘은 거의 집집마다 한대 있을 정도로 피아노가 흔하게 보급됐다. 심지어 중고 피아노를 길거리에 내어놓고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 가져가라는 메모까지 붙여 두고 있다. 중고 피아노 한대 값이 고물처리 하는 비용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나라에 피아노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대구 지역에 피아노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초기 동산병원 원장이던 존슨 박사(1869-1951)가 가져온 것이 효시다. 부산항에서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화원에서 하역한 다음 가마에 싣고 대구 읍성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 피아노가 현재 동산의료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건반의 흰 쪽 부분이 떨어져 나간 곳이 많지만 아직 소리가 잘 울린다. 초등학생 시절 가정환경 조사를 할 때 피아노, 자전거, 라디오 등이 있는 지도 빼놓지 않고 조사했는데, 이는 신학기 마다 되풀이 됐다. 피아노가 있는 집은 부유한 집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또 과외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는 친구는 몇 안됐다. 내 친구 김군은 초등 5학년 때 반 아이들 앞에서 ‘소녀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