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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계명의 현장

2006학년도 하계 베트남 국외봉사활동 후기

가보지 못한 낯선 땅을 밟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어 설레는 경험일 것이다. 월남 전쟁, 제3세계라는 이미지밖에 없었던 낯선 베트남. 출발하기 전 이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지만 막연히 설레었고 앞으로 생길 일들에 대해 기대되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그 나라에서의 봉사 활동과 문화 체험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는 그 곳

2006년 7월 13일 우리 국외봉사단은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노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봉사활동보다 더 힘든 더위와의 싸움을 직감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여름은 밤중에도 30°를 웃도는 폭염이었던 것이다. 숙소로 이동하는 도중 목격한 진풍경은 다시 한 번 다른 세상을 실감하게 했다. 신호등이 없는 도로를 수십, 수백 대의 오토바이들이 쉴 틈 없이 경적을 울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양보란 없었다. 재주 것 제 갈 길로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너무나 무질서하고 희귀한 그 광경이 놀라웠고 그 당시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무섭기까지 했다.

그 후로 3~4일간은 오토바이 경적소리에 잠 못 이뤘던 기억이 난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는 그나마 안심이었으나 시간을 내 잠시 찾은 야시장으로는 도보로 이동했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오토바이들과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로를 지날 때 안내하시던 분이 절대 뛰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천천히 걸어가면 알아서 피해 다닌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곳에서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었던 것이다. 쉴새없이 빵빵거리는 경적도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 사고를 막고자 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정신없이 이동하며 둘러본 베트남의 야시장은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과 같이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곳이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는 아는 만큼 느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의 이질적인 환경에 대해 이해를 하자 마음이 편해지면서 시야가 넓어짐을 느꼈고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둘러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 "Xin chao!" 베트남

우리가 봉사활동을 한 지역은 하노이에서 차로 50분가량 이동해야 하는 시골이었다. 그곳은 복잡한 하노이와는 달리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베트남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었던 곳이다. 뜨쯔엉 유치원 신축공사의 외·내부 마무리 작업과 건물 내부의 벽화작업, 그곳 유치원 학생들을 위한 풍선아트, 태권도 시범단, 댄스팀의 공연 등의 문화 봉사활동을 펼쳤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이고 종교의 자유는 있으나 선교 혹은 포교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물론 우리가 그곳에 간 목적이 선교 활동은 아니었지만 그 이유로 봉사활동을 하는 내내 공안들이 우리를 감시했었다.

처음에는 서먹한 우리들이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를 바랐을 지도 모를 그 사람들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 짜오!”, “신 짜오!”(안녕하세요!)를 연발하며 애살맞게 구는 우리 봉사단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열심히 일하기 위해 갔기 때문에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나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찌는 듯한 무더위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 무더위 때문에 점심 식사 후 한 두 시간씩은 꼭 낮잠을 잔다고 한다. 우리들도 오전 일을 마치면 어김없이 그네들과 함께 잠을 청했지만 찜질방 안에서 두 시간씩 잘 수 있는 한국 사람은 드물 것이다.

봉사활동 기간 동안의 점심 메뉴는 언제나 라면이었지만 후식으로는 항상 베트남 현지의 다양한 과일을 먹었다. 요상하게 생긴 따뜻한(?)과일들이 입에 맞지 않는 듯 했지만 만족하면서 먹는 법을 배워야만 했고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그곳 주민과 아이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준공식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떠나는 날 아이들이 손수 준비한 조그만 선물을 우리에게 건네었을 때의 가슴 뭉클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별이 아쉬웠는지 봉사활동 기간 내내 나와 눈을 마주치면 싱긋이 웃기만 하던 한 베트남 소녀는 마지막 날 내 눈길을 애써 피하는 듯했다. 친절하고 소박했던 뜨즈엉면의 사람들과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해맑은 얼굴들은 오래토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베트남의 국민적 영웅 - 호치민 영묘 탐방

호치민은 베트남 현대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탁월한 정치적 지도력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유독 한국에서 '베트남 공산당의 붉은 우두머리’ 로 인식되고 있다. 나 또한 호치민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고 위대한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융통성 없는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자명했다. 베트남의 역사는 전쟁과 투쟁의 역사이다.

오랜 기간 식민지로 피폐한 약소국인 이 땅을 호치민이라는 사람이 60여 년간의 투쟁의 결과로 지금의 베트남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는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53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을 포함해 베트남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조국 안에서 단결하도록 이끌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통일 영웅’인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 한나라의 국부(國父)로서는 궁색하다 싶을 정도로 검소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 만큼 조국을 사랑했다.

또한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여 베트남 국토 여기저기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호치민이 죽더라도 곁에 두고자 한 베트남 국민들의 염원에 따라 현재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호치민 영묘에 안치되어 있다. 실로 그의 시신은 마치 밀랍 인형같이 잘 보존되어있었다.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베트남 사람들까지도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긴 줄로 늘어서 있었다.

처음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무슨 일로 저렇게 긴 줄을 서서 잠시 스쳐 지나듯 볼 수 있는 그를 보겠다고 뙤약볕 아래서 기다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지 가이드를 통해 차츰 호치민에 대해 알게 되면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있어 그를 보는 것은 상당히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나 또한 세계적인 영웅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 영광스럽게 느껴졌다.


● 하늘에서 내려온 龍- 하롱베이

문화탐방의 막바지에 이르러 UNESCO가 지정한 세계절경 중 하나인 하롱베이를 다녀왔다. 3000여개에 달하는 석회암 섬들이 여기저기 떠있는 하롱베이의 바다가 잔잔히 넘실거리고 있었고 선상에서 바라다보는 크고 작은 섬들의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석회동굴안의 모습은 자연의 위대함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사진으로 담으면 그 본 모습이 망가질 정도로 멋진 동굴 속 풍경은 눈으로 담고 머리에 고이 새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처음으로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므엉족과 같은 베트남의 대표적인 소수민족을 탐방을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관광지 어디를 가나 베트남 상인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따라붙었다. 공산품이 다양하지 않은 베트남에서 그들이 파는 것이라고는 손수 만든 천 가방이나 지갑, 자잘한 장신구등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중국산인 경우도 있었다. “언니, 사세요. 한국 돈으로 천원!” 그들은 장사를 하기 위해 필요한 한국말을 곧잘 하였다. 실제로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고 한국인 관광객도 많았다.(특히 하노이 시내를 달리는 버스며 택시는 Made in Korea가 대부분이다.(^^)v) 그렇게 아름다운 하롱베이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출국하기 위해 하노이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벌써부터 아쉬움이 밀려왔다.


● 2006년 하계 베트남 국외봉사단 - “너는 내 운명!”

2006년 4월 국외봉사단에 참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렇게 멋지고 좋은 선생님들과 단원들이 함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베트남의 덥고 짜증나기 쉬운 날씨에 모두들 나름대로의 힘든 고충이 있었을 테지만 티내는 사람 한명 없었고 다른 단원들을 배려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단원들의 아주 조그마한 불편 사항까지 세심하게 배려해주시고자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선생님들께 너무 감사하고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매일 개그맨처럼 웃겨주던 단원들도 너무 고맙다. 12박 1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베트남이라는 낯선 땅에 단원들의 땀과 사랑을 남기고 그리운 추억만을 안고 돌아온 우리.

이제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정든 사람들과 베트남의 정취를 곁에 둘 수 없다는 아쉬움에 당분간은 마음이 심란할 것만 같다. 그러나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마음을 가지련다. 내게 주어졌던‘2006년 하계 베트남 국외봉사단’의 일원이라는 행운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며 더 나아가 계명대학교의 학생임이 자랑스럽다. 2006년 하계 국외봉사단 베트남 팀 파이팅~!!!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