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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50주년 기념 특집 학술 기획[2]-동물은 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종(種)차별주의는 인종차별주의만큼 부도덕 - 동물에게 고통 주는 일 피해야

살아있는 철학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는 피터 싱어가 우리 대학을 다녀갔다. 명경의료재단에서 후원하는 <다산기념철학강좌>의 연사로 초청된 그는 지난 18일 오후 행소박물관에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게 한 주제인 ‘동물윤리’에 대해 강연하고, 청중들과 열띤 질의 토론도 벌였다. 이 글은 강연 내용을 축약(번역 및 축약 : 철학부 박상혁 교수)한 것이다. - 편집자 주 -

이 강연의 요지는 동물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동물들의 이해(利害)도 인간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하고, 따라서 우리는 동물들의 이해를 무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동물을 식용으로 사용하거나 사소한 실험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종차별주의
인간과 동물 사이의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물 역시 인간처럼 고통 받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물도 우리 인간처럼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동물들이 인간종(human species)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물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 한다면, 이런 논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들이 속한 인종(race)이나 성(gender)에 속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든지 말든지, 우월한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의 논리에 가깝다.

비록 대부분의 인간들은 추론의 능력과 그 밖의 지적인 능력에 있어서 동물보다 탁월하지만, 그런 차이가 우리가 인간과 동물 사이에 갈라놓은 선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아기나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동물들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능력을 갖지만, 만일 누가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회사에서 만든 상품이 안전한지를 검사하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가해 보자고 제안한다면, 우리는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나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작은 우리에 가두고 그들을 식용으로 쓰기 위해 죽이는 것을 도덕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물들에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은 현행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관행이 ‘종차별주의’(speciesism)라는 신호다. 어떤 형태의 차별주의는 지배적인 집단에게 편하기 때문에 존속되는 편견인데, 종차별주의의 경우 주된 집단은 백인이나 남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다.

2. 인종차별주의와 종차별주의는 유사한가?
영국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나와 달리 종차별주의를 옹호한다. 윌리엄스는 종차별주의가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와 다르고 도덕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종차별주의 사이의 유사성이 완전히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맞는 말이다. 윌리엄스는 왜 그런지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인간과 캥거루 사이의 차이는 다른 인종 간의 차이나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나 자신도 『동물해방』(Animal Liberation)의 초판에서 그렇게 말한 바 있다. “정상적인 성인의 탁월한 정신적 능력, 예컨대 미래에 대한 기대나 지나간 일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기억,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풍부한 지식 등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큰 차이를 만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논변은 종차별주의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성공적인 응답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른 종의 성원들이 우리 종의 성원들이 가지는 탁월한 정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종차별주의를 이런 종들 간의 정신 능력의 차이에 기초한 차별이 아니라 종에 기초한 차별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3. 당신은 어느 편인가?
인간의 편견을 방어하는 윌리엄스의 마지막 수단은 가장 중요한 부분에 이르면 놀랍도록 단순하다. 그는 자비롭고 공정하며 먼 안목을 가진 외계인들이 지구를 식민화하고, 이 외계인들이 의심할 바 없이 공정한 마음과 완전한 정보에 근거해서 ‘우리를 제거하는 것’ 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외계인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윌리암스에 따르면 비록 외계인들이 공정하고 모든 존재들의 더 많은 권익을 위해서 행동한다 하더라도, 이 때 우리가 서로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은 “너는 어느 편이냐?”는 것이다.
윌리엄스가 인종차별주의와 종차별주의 사이의 유비를 부정하고 나서 “너는 어느 편이냐?”를 자신의 논변의 궁극적인 거점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의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많이 들어온 질문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혹은 이념적 갈등의 시기에 그 질문은 집단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해 사용되고 이런 싸움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반역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50년대 미국의 매카시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싸우는 자신들의 방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물었고, 지금 미국의 부시행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물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너는 어느 편이냐?”는 세계를 ‘우리’와 ‘그들’로 나누고, 이런 구분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윤리적 문제들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받은 상황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올바르고 용기 있는 일은, 옳든 그르든 나의 부족(나라, 인종, 민족, 종교, 종 등)이라고 말하게 하는 부족본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올바른 쪽에 서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공정하고 모든 정보를 알고 먼 안목을 가진 판단자가 더 많은 부정의와 비참을 피하기 위해 우리 종족을 제거하는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결정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부족 혹은 종 본능을 누르고 윌리엄스의 질문에 같은 식으로 대답해야 한다. 즉 올바른 쪽에 서겠다고 대답해야 한다.

4. 자식들, 친족 그리고 종
캘리포니아 대학(리버사이드 캠퍼스)의 명예교수인 루이스 페트리노비치는 조류학과 진화론의 권위자인데 그는 우리의 생물학적인 본성이 어떤 경계를 도덕적 명령으로 전환시킨다고 말한다. 이런 경계들로 ‘아이들, 친족, 이웃 그리고 종’을 들고 있다. 만일 이 논변이 가족과 친구라는 보다 좁은 범위와 종이라는 보다 넓은 영역 양쪽 모두에서 성공적이라면 이 논변은 그 중간 범위인 인종에 대해서도 성공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페트리노비치는 그런 결론을 도출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자신이 속한 인종의 이해관계를 다른 인종의 이해관계보다 우선시하는 것을 지지하는 논증은 친족, 이웃 그리고 우리 인간종의 성원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논변보다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만일 인종이 도덕적으로 적절한 경계가 아니라면 왜 종이 도덕적으로 적절한 경계여야 하는가?

5. 사회계약론과 동물
피터 커라더스는 도덕은 만일 내가 너를 해치지 않는다면 너도 나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합의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동물들은 이런 사회계약에 참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들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도덕에 대한 이런 사회계약론적 접근 방식은, 이것이 어린 아이들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세대에 대해서는 우리가 직접적인 도덕적 의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분히 문제가 있다.

만일 우리가 수천 년이나 유해한 방사성 쓰레기를 생산해서 그것을 1백50년 동안만 유지되는 용기에 넣어 가까운 호수에 버린다면, 그것은 비도덕적일까? 만일 그런 행동이 비도덕적이라면 도덕은 상호성에 기초할 수 없다.

6. 논쟁에 대한 평가
이 문제에 대한 과거 30년의 논쟁을 돌이켜 볼 때, 쾌고(快苦)감수성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즉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존재들이 평등하게 고려될 권리가 있다는 견해에 대해 그 어떤 근본적인 반대도 제시되지 못했다고 나는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쾌고감수성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이해관계가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그런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평가해야 하는 어려움을 피하기 어렵다. 한 존재가 살아 있는 동안 갖게 되는 이해관계는, 부분적으로는 그 존재가 자기 자신을 시간의 흐름 안에서 지속하는 존재로 의식하는가와 미래지향적인 욕망을 형성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자신이 시간적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존재는 계속 살기를 원할 수가 없고, 따라서 죽음이 그런 욕망을 좌절시킬 수도 없다. 바로 이점에 있어 자의식(自意識)이나 미래를 지각하는 감수성 같은 특징들은 한 존재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해를 끼치는 지에 대한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만일 물고기가 물 밖으로 잡혀 나온다면 물고기조차도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버둥거릴 것이라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고기가 자신을 의식하고 계속 살기를 원한다는 표시일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확실히 괴로워할 것이고, 아마 서서히 질식되면서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 고통 때문에 그것은 버둥거린다. 하지만 물고기가 버둥거린다는 사실로부터 물고기 스스로 시간적 존재임을 알고 있고 계속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존재들이 쾌고감수능력을 가지는가? 모든 포유류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듯이 보이고, 새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심이 없어 보인다. 물고기와 무척추동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논란이 있다. 하지만 물고기의 행태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물고기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갑각류와 벌레들에 대해서는 확신하기가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들의 행동은 보다 의식이 요구되지 않는 것 같은 방식으로 프로그램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윤리적인 행동의 방식은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7. 동물해방운동의 성과
동물해방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동물실험과 동물학대의 영역에서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레브론, 에이본, 브리스톨-마이어스 같은 큰 화장품 회사들은 통상적으로 그들의 상품을 시판 전에 동물에게 실험해 왔다. 그들은 수천마리의 토끼들을 나무상자 속에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토끼들의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화장품에 사용되는 성분들을 토끼들의 눈에 집어 넣었다. 그 후 기술자들이 하루나 이틀 후에 돌아와서 토끼들의 눈에 가해진 피해를 측정했다. 때로 매우 부식성이 있거나 산성이 있는 것들을 토끼 눈에 넣었고, 그 결과로 안구에 수포가 생기고는 했다.

우리는 이것이 토끼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다. 다행히 동물해방운동의 결과로 이 회사들은 더 이상 그 제품들을 동물에게 실험하지 않게 되었고, 동물의 눈에 대한 실험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모피 역시 어느 정도 진보가 이루어진 다른 영역이다. 많은 유럽의 국가들과 북미에서 모피산업에서 동물에 가해지는 고통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후에 모피는 예전보다 인기가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 인간의 동물 학대가 가장 중요한 분야는 동물 사육인데, 이 영역에서 사용되는 동물의 수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만 1년에 1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사육되고 음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축된다. 유럽에서는 이런 산업 전체가 공장 식으로 사육되는 동물의 복지에 대한 공중의 관심으로 인해 변화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변화는 북미에서도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낙관주의자들에게 가장 고무적인 일은 수백만의 운동가들이 동물해방운동을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돈을 자발적으로 제공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동물학대를 지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식생활과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다. (계란과 유제품 등은 먹는) 통상적 채식주의와 (계란과 유제품 등 동물로부터 산출되는 어떤 것도 먹지 않는) 완전한 채식주의가 북미와 유럽에서는 30년 전보다 훨씬 더 널리 퍼지고 있다. 비록 이런 변화가 얼마만큼이나 동물에 대한 배려에 의해 촉발된 것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이들 중의 일부가 그렇다는 데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8. 동물해방운동의 전망
현대 동물해방운동이 이루어낸 성취에도 불구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동물을 위한 상황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졌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동물해방의 성취는 중산층이 점점 증가하고 더 부유해지는 중국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장식 가축사육이 증가하는 것에 비교해볼 때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확신컨대 한국도 그런 나라 중의 하나다.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살아있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신선한 공기나 태양이나 풀도 모르고 도축을 위해서 트럭에 실려지기 전까지 실내에서 비참한 삶을 산다. 요약하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동물해방운동에서 거둔 결과가 입증하는 것은 한 종으로서 우리 인간들이 다른 존재들을 위한 이타적인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는 불완전한 정보, 강력한 이해관계와 불편한 사실들을 알지 않으려 하는 우리의 욕망이 동물해방운동이 이룩한 성취를 제한적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