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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영화 속 인물의 성격으로 알아본 정신질환

영화, 동일시를 통해 객관적인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기회의 창

영화는 시·청각적 이미지와 서사가 결합되어 있어서 정신질환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영화 장면을 매개로 구체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통하여 자신의 문제나 갈등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지금부터 흔히 볼 수 있는 주요정신질환을 다루고 있는 몇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에서는 정신증(Psychosis)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과거에는 질병 자체보다는 광기나 잠재적인 범죄자 혹은 위험하고 기이하거나 지나치게 매력적이거나 천재적인 속성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노벨상을 수상한 존 내시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뷰티풀 마인드’(2001)는 정신분열병에 대해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2002)에서는 군대에서 민간인을 간첩으로 오인 사살한 강상병(장동건)이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병 증세를 보인다. 망상 때문에 남을 해치거나 살해했을 때, 그 책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군대에 가서 정신병이 발병했을 때, 국가의 배상은 가능한지 등의 문제에 대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지구를 지켜라’(2004)의 병구(신하균)는 외계인인 강사장이 지구를 전복시키려고 한다는 정교하고 체계적인 피해망상을 가진 망상장애라는 정신병을 보인다.

우울증을 소재로 한 영화는 자주 접할 수 있다. ‘사랑이 변하는 거니?’라는 대사로 유명한 ‘봄날은 간다’(2001)에서 사랑하는 은수(이영애)가 상우(유지태)를 떠나버리자, 상우는 그해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의욕을 잃고 은둔생활을 한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로 야기된 급성우울장애로, 이별같은 애착단절의 문제는 우울증의 주요 원인이 된다.

마이클 크닝헴의 소설 ‘세월’을 영화화한 ‘디 아워즈 The hours’(2003)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여러 종류의 우울증을 나열하고 있다. 영화는 20세기 대표적인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심한 감정기복과 환청에 시달리면서도 창작에 몰두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평생 조울병의 그늘에 가린 그녀의 사생활을 조명하고 있다. 정체성과 관련된 중년기 주부우울증, 에이즈로 투병 중인 애인을 헌신적으로 돌보며 끊임없는 이타적인 삶과 완벽주의로 에너지가 고갈해 발병한 우울증, 불치병에 걸린 사람의 이차성 우울증 등이 있다. 이처럼 우울증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하지만 울프에게 조울병은 정말 끔직한 방해물이었을까. 천재 문학가에게 우울증은 심연의 진리의 깨달음과 창작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은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성격 문제와 그에 파생되는 역동적 인간관계를 다룬 영화가 증가하고 있다. 경계성 성격장애를 다룬 영화로는 ‘얼굴없는 미녀’(2004)가 으뜸이다. 주인공 지수(김혜수)는 자기가 마련한 파티에 아무도 오지 않자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기며 손목 동맥을 자르는 자살 소동을 벌인다. 이들은 버림받지나 않을까 하는 유기불안에 시달리며, 불안정하고 변덕스런 대인관계를 맺는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의 이우진(유지태)은 편집성 성격장애다. 친누나와 근친상간의 금기된 사랑의 비극을 오대수(최민식)의 탓으로 단정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이우진은 남의 동기를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원한을 품고,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해 용서하기보다는 지속적인 앙심을 품는다. 편집성 성격장애는 부당하게 의심하고, 집요하게 물증을 찾고,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 요지부동의 냉혈인간들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스칼렛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역으로 오스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비비안 리는 그녀 자신이 히스테리성 성격의 소유자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은 미모와 오만한 성격으로, 뭇남자들을 유혹하고, 매력적인 사람이 나타나면 오래된 관계는 쉽게 무시해버린다.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을 영화화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블랑쉬 역시 히스테리성 성격의 소유자로, 연극조의 말투로 별것 아닌 것에도 눈물을 흘리며 과장된 감정 표현을 한다. 허영과 가식에 찬 블랑쉬는 현실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 파국을 맞는다.영화 ‘남아있는 나날’(1993)의 스티븐슨(안소니 홉킨스)은 원리원칙과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는 강박성 성격이다. 철두철미한 직업의식, 정리정돈, 엄격한 규칙에 따른 일처리, 실수가 있지 않을까 점검하느라 일의 속도가 항상 늦어진다. 감정표현에 인색하여 사랑하는 여인에게 내색을 하지 못하고 그냥 떠나보낸다. 강박적 성격과 강박장애는 서로 다른 질환이다. 강박적 성격은 완벽주의에 대한 끝없는 추구 때문에 확인을 거듭할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자아동조적이라면, 강박장애는 확인하는 반복행위로 인해 고통스럽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는 점이 다르다.

미국의 억만장자였던 하워드 휴즈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에비에이터’(2004)는 강박증상과 불안심리를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다. 세균오염에 대한 불안을 가진 하워드는 하루에 수십 번씩 손을 씻고, 악수는 절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하워드가 공중 화장실에서 손을 씻느라고 수건을 모두 써 버린 후, 문고리를 잡을 수건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당황하다가, 결국 밖에서 다른 사람이 문을 열 때까지 화장실에 갇혀있는 장면은 강박증 환자들이 겪는 애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히 명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번지점프를 하다’(2000)에서 동성애와 자살심리를 엿볼 수 있다. 어엿한 가장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인우(이병헌)는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지만, 스승과 제자, 둘다 남자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한계를 깨닫고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끈을 매지 않은 채 번지점프를 한다. 이승에서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는 이루고자 하는 재결합에 대한 환상으로 자살을 감행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정신과의사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영화 속에 비친 정신과 의사의 이미지를 통해 현재 일반인의 정신과에 대한 시선을 간접 확인할 수 있다. 공포영화 ‘폰’(2002)에서는 자신의 원조교제를 파헤친 기자를 스토킹하고 살해하려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정신과의사가 등장한다. 영화 ‘H’(2002)에서는 연쇄살인범인 주인공의 심리에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려는 가학적인 여자 정신과의사가 나오는데, 결국 주인공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영화 ‘리베라 메’에서는 치료한 환자가 연쇄방화범으로 쫓기게 되자, 정신과의사는 환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지나친 나머지 알리바이를 조작하여 수사에 혼선을 준다. ‘얼굴없는 미녀’에서는 정신과의사(김태우)가 최면치료 도중에 지수(김혜수)를 강간하고, 의사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집착이 수그러들지 않고, 결국 마약에 중독되어 환각에 시달리다 추락사한다. 대체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정신과의사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정신질환이나 정신과에 대한 편견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지금까지 흔히 볼 수 있는 주요정신질환을 다루고 있는 몇 편의 영화를 소개하였다. 이처럼 영화 장면을 매개로 구체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통하여 자신의 문제나 갈등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영화는 시청각적 이미지와 서사가 결합되어 있어서 정신질환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