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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가문의 등장 창성창본(創姓創本)

성씨의 재발견과 진정한 한민족공동체의 의미


서울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씨 아니면 이씨가 맞는다고 하였다. 어떤 모임에 가도 그들 성씨는 꼭 한명이라도 끼어있게 마련인 반면, 대단한 희성도 있다. 희성은 아니더라도 숫자가 적은 성씨들이 수두룩하다.

필자는 신안주씨 능성본이다. 한국에서 주씨는 김씨 등에 비하면 대단히 적은 숫자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유학의 대가 주자를 비롯하여 명나라의 개시조인 주원장에 이르기까지 주씨가 다성이고 이씨 등은 오히려 희성이다. 본디 주씨의 선조는 중국에서 망명 온 이들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주씨로 다시 인정받았으며, 그네들이 처음 정착하여 뿌리내린 장소가 현재의 전라도 화순 정도에 있는 능성현이었기에 능성본이 된 것이다. 이처럼 필자의 족보 내력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성씨와 본이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으로 투항하여 조선인이 된 일본인들도 꽤 있다. 그네들은 임금으로부터 사성, 즉 성씨를 부여받아 조선사람이 되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화란인 벨테브레, 즉 박연도 조선사람과 결혼하여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 성씨는 이처럼 중간 중간에 창조되는 것이다.

안동에 가면 양반들이 많다. 그런데 어떤 양반들은 기실 양반집의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독립하여 나가면서 양반댁의 성씨를 빌려서 대외적으로 자칭 양반으로 행세하는 경우도 있다. ‘뼈대 있는 족보’를 따지는데 그 ‘뼈대’의 근거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조선전기에는 인구대비 양반이 30% 미만이었고 나머지는 평민이거나 노비신분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상황이 역전된다. 오늘날에는 평민이나 노비 등의 개념이 없지만, 누구나 자신의 조상은 양반이었을 것으로 치부하기 마련이고 누구나 족보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족보 없던 노비의 후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족보는 홉스 바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들어진 역사’이며, 족보가 만들어진 역사 자체가 고려말 이상을 소급하지 못하며, 전쟁통에 사라진 족보들도 허다하여 새로 만들어진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한즉, 족보나 성씨의 근본을 들먹이며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봉건적 태도를 오늘날까지 간직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신기루를 붙들고 거꾸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닐까.
한국인들의 지나친 동족간의 집단의식도 문제이다. ‘유구한 역사, 단일민족의 하나된 역사’ 따위의 허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가령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자. 고구려는 분명히 만주벌판에 있었다. 부여족들만 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수민족들, 소위 오늘날에 만주족이라 부르는 선조들이 같이 살고 있었다. 그 고구려의 핏줄이 이어지고 있다면 그 핏줄 안에는 다양한 이민족의 핏줄도 포함된 것 아닐까.

몽골지배기에 고려의 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몽골공주를 배필로 맞이해야했다. 공민왕의 부인도 노국공주였다. 그렇다면 그네들의 후손, 정확히 말하여 고려 왕족들은 모두 몽골핏줄을 이어받은 셈이다. 그 후손들은 모두 죽었는가. 아니다.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다양한 색깔의 외국인을 경시하거나 배척하고 혐오하는 한국인의 순혈주의는 어쩌면 그 자체가 인종차별이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대개 백인을 좋아하고 흑인이나 여타 유색인종을 싫어한다. 자신도 유색인종이면서 백인을 선호하는 아주 나쁜 인종관에 물들어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들이 인종문제에 관하여 너그러운 것인양 위장하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에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속속 불어나고 있으며, 국제결혼으로 이른바 코시안이 늘어나고 있다. 그네들에게 한양김씨, 대전박씨 등 새로운 본관이 부여되고 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들이 본관과 성씨를 만드는 창성창본(創姓創本) 사례가 급증하면서 생긴 새로운 현상들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3D산업에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취업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이들 노동자들이 없다면 한국노동시장은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네들이 한국인과 국제결혼하면서 생겨난 아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튀기’, ‘아이누꼬’ 따위의 말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아이누꼬란 말의 기원이 무엇인가. 일본은 북해도에 살던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학살하고 무시하였다. 거기서 생긴 말이 아이누꼬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가학적인 말을 서슴없이 쓰고 있다.

앞으로 한국에 살아가는 외국인노동자 비율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노동시장의 국제화가 촉진되면서 생긴 당연한 현상이다. 국제결혼은 더욱 늘어날 것이며, 장차 한양김씨, 대전박씨 같은 성씨들은 수백년 지나면 수만, 수십만이 될 것이다. 필자의 선조들이 중국에서 망명와서 뿌리내리고 지금은 백만이 넘는 숫자로 불어났음을 고려할 때와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그러한즉 한양김씨, 대전박씨 등의 출현을 의아한 눈길로 볼 필요가 없다.

그 창성창본의 근거는 법원의 소재지에서 유래하고 있다. 창성창본을 신청하면 법원은 특별한 사유나 연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정법원 소재지를 기준으로 본(本)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가정법원의 경우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서울의 한자표기인 ‘한양’이 본이 되고 대전지법의 경우는 ‘대전’, 춘천지법의 경우는 ‘춘천’이 본이 되는 식이다. 대구지법에서 얼마든지 대구주씨, 대구나씨 식의 성씨가 출현할 것이다.

과거의 성씨가 자신의 거주지로부터 출발하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한즉 부산에 거주하면서 아이를 낳은 귀화한 외국인이 부산김씨, 부산이씨 등의 이름을 가지고 창성창본을 한들 무슨 문제가 있으랴. 법원도 법적으로 이를 인정하고 창성창본을 허락하게 된 소이가 여기에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불어날 수밖에 없는 외국인과 그들의 자손이 한민족 공동체 안에서 평화롭게 같이 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한민족공동체라는 말의 참뜻은 똘똘뭉친 순혈주의가 아닌, 커다란 차원에서의 관용과 포용의 공동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설] 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해야 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지식의 습득은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식 정보를 수집해 핵심 가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읽기다. 각 대학들이 철학, 역사, 문학, 음악, 미술 같은 인문·예술적 소양이 없으면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고전과 명저 읽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교과 과정으로 끌어들여 왔다. 고전과 명저란 역사와 세월을 통해 걸러진 책들이며,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저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하는 정신의 등대 역할을 하는 것이 고전과 명저라 할 수 있다. 각 기업들도 신입사원을 뽑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하는 등의 특별 전형을 통해 면접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거나, 인문학책을 토대로 지원자들 간의 토론 또는 면접관과의 토론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등 어느 때보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있다. 심지어 인문학과 예술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