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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계명의 현장

우리는 베트남에 마음의 진 빚이 있다

베트남으로 출국하기 전 내가 알고 있는 베트남이란 나라는 지구상에 몇 안 남은 사회주의 국가, 정말 더운 곳, 못사는 나라였다. 출국일 아침 대구를 떠나, 인천공항을 통해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공항에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이미지는 변함이 없었다. 하노이공항에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푹푹 찌는 습도 높은 더위, 그리고 베트남 입국심사대에 서있던 제복 입은 베트남 고위간부, 현지인들의 허름한 옷차림은 내가 알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 때만해도 ‘버려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잘사는 우리가 베풀어야지’ 하는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내 무의식속에는 문화적 상대성이란 말은 없고, 한·베트남의 문화적 차이를 경제력의 잣대로 인한 수직적인 구도로 이해하려고 하는 맘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하노이 공항에서 우리가 묵어야 되는 숙소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후 나의 생각은 달라졌다.

6.25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2번째로 가난한 나라로 꼽혔던 시절, 안남미(安南米)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대량의 식량지원을 해준 국가, 그런 고마운 나라에 피와 참극으로 되갚은 한국. 비록 (전)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베트남에 대규모의 투자와 공장설립으로 인해 베트남 경제를 이끈 선봉장의 역할을 하였다지만, 그것으로서 현지인들 한사람 한사람의 감동을 안겨줄 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작지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와 감사의 마음이 실천으로서 이어질 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동안 난 베트남이라고 하면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람들, 융통성 없는 정부, 베트남처녀와 결혼 하세요’를 제일 먼저 떠올렸었다. 많이 부끄러웠다.


● 실천하는 사랑의 기쁨 (뜨즈엉 유치원 건립공사)

그 곳 현지 날씨는 대략 섭씨 35도, 습도 70%이상의 날씨였다. 그늘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비오는 쏟아지는 날씨…….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던 터라, 물에 젖은 수건을 목에 감고, 썬크림을 온몸에 발라보았지만, 흐르는 땀에 모두 씻겨 내려가는 지라, 효과는 30분도 못 보는 날씨였다. 봉사활동 첫날부터 땀을 이만큼 흘리고 있으니, 그저 시원한 냉탕에 몸을 푹 담그고 싶다는 생각이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현지민 들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니, 그나마 견딜 만 했다.

봉사활동 기간 동안 계명대학교 국외봉사단이 맡은 임무는 크게 두가지 였다. 하나는 하노이 인근 뜨즈엉 이란 지역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유치원을 건립해주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지역 주민들과 어린이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리는 알리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유치원 건립 작업은 둘째 날부터 시작됐다. 이미 한국에서 송금한 공사비로서 어느 정도 공사 진행은 마친 상태였다.

이제 이곳에서 우리가 하는 작업은 유치원 도색작업, 유치원 건물 내 벽화그리기 작업, 외부 담장 세우기 작업, 운동장 모래 깔기 및 평탄화 작업 등이었다. 푹푹 찌는 더운 날씨 속에 무슨 작업이 안 힘들겠냐마는 내가 생각할 때 가장 힘든 작업은 외부 담장을 세우기 위해 땅을 30cm가량 파나가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군복무동안 포병부대에 근무해서 곡괭이질, 삽질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지만, 오랜만에 해보니 체력이 금방 고갈되는 것이 격세지감을 느꼈다. 평소에 내 몸 건강을 위한 투자가 너무 부실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모든 지역주민들이 우리를 너무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정감 있게 대해준 부분이다. 특히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갔던 현지민가의 아주머니와 여자아이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아주머니는 먼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은 직접 과일을 깎아서 입에 넣어주시는 등 가족처럼 뒷바라지 해주셨고, 오엥이라는 여자꼬마아이는 언니 오빠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장난도 치는 등 더위에 지친 우리를 재밌게 해주었다. 같은 유교권 문화의 국가라서 그런지 정(情 )이 많았다.

그렇게 5일간의 봉사활동이 끝나고, 우리가 지은 유치원의 준공식이 열릴 땐 마치 모 방송의 러브하우스를 보는 것처럼 너무 뿌듯했다. 동네 아이들, 주민들, 노인들이 모두 모여 마을 잔치를 열고, 그들과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을 땐 정말이지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아이들이 건립된 뜨즈엉 유치원 계명관 안에서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좋아서 뛰어다닐 때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비록 내가 여기서 한 부분은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실천이 되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무엇이 된다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 대한민국과 계명대학교의 위상 (문화 봉사활동)

뜨즈엉 마을 사람들은 교육열의가 대단했다. 비록 아이들이 신발이 없고 맨발로 다니는 일이 있더라도 자녀들을 위해 학교교육은 꼭 시킬 것처럼……. 이번 그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주기 위해 진행됐다. 문화 봉사 활동은 크게 태권도 시범, 댄스공연, 풍선아트로 구성되었다. 베트남으로 출국 전부터 각 팀별로 따로 모여서 준비를 했었던 우리들은 공연하는 날 그렇게 많은 지역 주민들이 몰려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베트남에서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태권도에서 나왔을 만큼 현지에서 태권도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특히 격파 시범과 대련하는 장면에서는 환호성이 나왔다. 상대적으로 태권도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더라면, 내가 맡은 풍선아트는 아줌마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베트남이든 한국이든 부모의 자식사랑은 국경이 없는 것처럼, 그쪽 현지민들도 우리가 만든 풍선아트를 먼저 자기자식에게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한국에서 편안한 자세로 작품을 만들다가 손을 내미는 아이들 때문에 머리 위에서 풍선아트를 만들다 보니, 조금 불편하기도 했지만, 서로 달라고 손을 내밀면서 귀여운 표정을 짓는 아이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댄스공연은 그야말로 더위와 씨름을 했다. 사실 직접 음악을 선정하고, 음악에 맞는 안무를 짜서 모두가 통일감 있게 연습하기가 요즘 대학생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임에도, 매우 훌륭했다.

특히 한국전통의 탈을 쓰고 탈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아이들의 재미있어 하면서도 무서워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다만, 공연 전에 우리 탈춤에 대한 설명이 곁들었으면 더 좋았을 듯 했다. 이번 문화 봉사활동기간동안 우리는 아이들과 같이 뛰어다니고, 놀아주고, 사진도 찍어주면서 금방 친해 질수 있었으며, 그 때 당시는 누가 국경이니, 나이니, 성별이니 아무것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작은 것이었지만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으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고, 지금은 모르겠지만, 장차 커서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계명대학교란 곳을 한번쯤 기억에서 발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세계속의 우리, 우리들이 할 일(문화탐방기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노력봉사·문화봉사를 통해 베트남식 더위와 피로에 노출된 우리 봉사단은 그 다음 펼쳐질 문화 탐방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서 금새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베트남 최고의 산 판시판산(3,143m)이 있는 사파지역이었다. 이곳은 유럽 졸부들의 인기 있는 휴양지에 걸맞게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해발 3000m에 있는 마을의 성격상, 공기가 너무 좋았고, 하늘과 구름이 너무 예쁜 곳으로 기억된다. 특히 약 54개의 소수민족 중 고양이족, 원숭이족이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우리 대부분이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에 자연에 순응하여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하며 사는 그들의 모습이 좀 불편하진 않을까 생각도 됐지만, 그들은 너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았다. 다만, 최근에 그곳이 관광지로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고부터, 소수민족들도 자본주의 세계를 알았다는 점이 조금 아쉽긴 했다. 하노이로 돌아와서 우린 재래시장과 호아빈 댐, 호치민 주석 묘를 둘러보았는데, 우리가 철저히 반공교육을 받으면서 알아왔던 호치민이란 인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김구 선생과 같은 진정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특히 사생활도 청렴하고, 죽어서도 베트남이란 국가의 발전을 위해 화장을 해서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 부문은 요즘 한국의 정치인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지은 뜨즈엉의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 제 2의 호치민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육성되길 바라며, 끝으로 한국과 베트남간의 우호적인 외교적 노력 이외에 이번 국외 봉사활동과 같은 민간차원의 실천적 노력이 활성화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 이번 봉사활동을 마치면서 나에게 남은 건 검게 그을린 피부지만, 내 가슴속엔 아이들의 걱정 없이 활짝 웃는 얼굴들과 그 아이들의 꿈을 함께 담아왔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