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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을 두른 기독교인의 미소

외국문화를 존중하고 그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성숙한 세계관을 갖도록 노력해야


지난 8월 29일 AP통신이 매우 인상적인 사진 한 컷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그것은 아프간에서 탈레반에 납치되어 40일 동안 죽음의 공포 속을 헤매다 한국정부의 치열한 협상노력 끝에 석방된 이선영씨가 적십자사 차량 안에서 살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그는 히잡 (hejab:회교도 여인들이 머리에 감는 천)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공포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인질사태의 종결을 상징했다. 그러나 이선영씨 미소를 보며, 개인과 국가와 종교라는 삼각관계 속에서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은 죽음의 공포에 있고, 국가는 당황하고, 국민은 스트레스를 받고, 교회는 선교방법에 대한 논란에 빠지고…….

다행인 것은 인질들이 풀려나고 사태가 일단락된 것이다. 배형규목사 등 피랍자 2명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피랍 초기의 급박했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두 사람만의 희생으로 끝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필자는 인질사태가 이렇게 빨리 끝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인질 희생자도 훨씬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1세기 테러리즘의 화약고인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의 특수성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침공을 받았고, 이때 반군 무장세력으로서 미국과 사우디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군에 대항했던 것이 탈레반이다. 저항 결과 소련군의 철수로 탈레반 정권이 수립됐다.

그러나 탈레반 정부는 원리주의 회교율법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1990년대 중반 자국 내에 들어온 오사마 빈라덴에게 알카에다 조직의 은닉처와 훈련장을 제공했다. 2001년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의 부시정부는 대테러전쟁을 선포하고,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킨 뒤 친미정권을 수립했다. 탈레반은 다시 반군이 되어 과거 소련의 침공 때처럼 산악으로 숨어 저항투쟁을 벌여왔다.

아프가니스탄은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이 마찰하는 문명충돌의 전선이다. 게다가 친미정권과 탈레반간의 내전상태에 있다. 또 국제테러조직인 알카에다 세력의 은신처이기도 하다. 미국정보 당국은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은신해 있는 것으로 알고 아프간과 파키스탄에 압력을 계속 가하고 있다. 한마디로 아프가니스탄은 문명충돌, 테러전쟁, 그리고 내전의 십자선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아프가니스탄에 2002년 전쟁이후 재건 및 의료지원 부대원 200여명을 파병한 상태다. 아프간 파병은 순전히 미국과 아프간 친미정권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군 파병의 옳고 그름과 전략적 평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분명히 있으며, 찬성과 반대에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군의 파병으로 한국인이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무장테러단체의 표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탈레반의 목표는 아프간 친미정권을 몰아내고 탈레반정권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아프간에 파병한 이태리 독일 프랑스 등 나토국가의 국민과 언론인들을 납치하여 인질로 삼고 목표 달성을 위한 협상카드로 사용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이 위험지역이라는 것은 정황으로 보나 다른 파병국의 경험으로 비춰 볼 때 너무도 명확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정부당국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이라면 이런 위험에 예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샘물교회의 한민족복지재단 봉사단 23명은 결국 아무 대책도 없이 범의 아가리로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랍직후 외신들이 인용한 현지 주지사 및 경찰책임자의 논평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들은 이교도 사회에서 신변안전에 대한 대책도 없이 선교봉사활동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심대한 피해와 상처를 준 셈이다.

탈레반과의 협상타결에서 인질석방 조건은 한국군 철수와 아프가니스탄 선교활동 중지 및 한국교민의 철수다. 얼핏 보면 조건이랄 것도 없다. 한국군은 이미 연말 철수하기로 예정되었고, 이 판국에 선교활동을 중지하지 못하겠다고 정부가 우길 것인가, 선교단체들이 반발할 분위기인가.

이번 피랍사건을 협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인질생명 구출에 다른 무엇보다 우선했다. 그래서 초기 단계에서부터 탈레반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인질사고가 나자마자 대통령이 탈레반과의 접촉(사실상 협상)을 전 세계에 표명하고 나섰다. 이미 예정되었지만 한국군 철수도 확약했다. 테러집단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정부원칙의 포기이자 국제사회의 불문율을 내버린 것이다.

탈레반은 한국과의 협상기회를 이용하여 반란단체로 숨어 활동하던 자신들의 위상을 당당히 국제무대로 올려놓았고 아프가니스탄 안에서 그들의 기반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은 탈레반의 기를 살려준 꼴이다. 탈레반이 협상결과에 얼마나 만족했으면 “한국인은 우리 형제다”고 립 서비스를 할 수 있었을까.

한국은 반 테러전선을 구축한 서방국가로부터는 신뢰를 주지 못할 나라로, 테러단체로부터는 손쉬운 테러대상으로 인상에 남을 가능성이 높다. 인질석방과 관련해서 줄기차게 한국인을 괴롭힐 것은 몸값지불설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몸값 지불설을 부인했다. 웬만한 국민들은 그냥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협상과 관련하여 들어간 비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 벌어질 사태다. 인질납치를 노리는 테러집단에게 ‘한국인은 봉’이라는 인식의 확산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현실이 되었다.

우리 사회가 이런 유형과 무형의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이번 아프간 인질사태를 통해 그나마 얻을 것이 있다면 그 악몽의 경험과 교훈이다. 피랍자들은 국민과 그들의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 그들이 왜 그 토록 위험한 여행을 해야만 했는지 국민에게 알려줘서 재발을 막아야 한다.

그 경험과 교훈이 40일간 스트레스를 받았던 우리 국민에게 줄 수 있는 조그만 보상이 될 것이다. 특히 교회책임자들은 이번 사태에 적절한 해명을 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국민총생산규모(GDP)규모로 볼 때 세계 12위의 경제국이다. 우리나라의 부는 글로벌경제에서 나온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비즈니스를 하지 않고는 지킬 수 없는 경제규모다. 전 세계를 무대로 물류뿐 아니라 인적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해외여행은 한국인의 일상이 되었다. 출국자가 연간 1천만 명을 돌파했다. 해외연수나 유학을 가는 대학생들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젊은 직장인들은 배낭을 지고 세계의 오지와 위험지역을 경험한다. 해외여행이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었던 20세기의 우리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냉전종식 이후 인질납치나 자살폭탄 테러 같은 비대칭 위험지역이 곳곳서 늘어나고 있다. 이슬람과격주의자의 반미 및 반서방 전선이 형성된 곳은 바로 테러 지진대와 같다. 우리는 인질사태에 매우 취약하다. 그 급소가 이번 인질사건 대응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 문제가 터질 때마다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는 식으로 대처하는 국가정책은 맞지 않은 세상이 됐다. 많이 나가는 것을 전제로 한 국민교육, 정보수집, 외교력이 유기적이고 종합적으로 가도록 국가자원이 재배치되는 게 옳다.

국민의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 선진국을 향한 시민으로서 외국문화를 존중하고 그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성숙한 세계관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계는 아직 코즈모폴리탄이 아니다. 개인과 교회와 국가의 역할이 절제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번 사태의 재발을 막는 길이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