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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60주년 특집 - 사진으로 본 계명의 건축물 그리고 역사

캠퍼스 유토피아를 향하여


최소한 계명대와 함께한 시간으로만 봐도 내가 계명대 60년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인 것 같다. 학부 때부터 캠퍼스에 머문 시간을 다 합쳐도 십오 년이 안 되는데 30년, 40년 넘게 계명대와 동고동락해 온 분들이 많지 않는가. 원고 청탁을 제때 거절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고민했다. 그 와중에 내 머리를 맴돈 질문 하나. 계명대 60년을 이끌어온 하나의 정신이란 뭘까? 정신의 외화, 대학 캠퍼스란 결국 어떤 정신의 외적 형상이 아니겠는가. 해거름에 나는 저 질문을 화두인양 끌어안고 아담스 채플을 오르내렸다.

●계명정신과 나무
오월의 한 중간, 학교에서 가장 높은 채플에서 내려다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나무다. 성서 캠퍼스에만 6천 그루가 넘는 나무가 있다니 오죽하겠나. 퍼뜩 나무에서 계명정신과 유사한 이미지가 보였다. 크든 작든 ‘땅에 뿌리를 내리되 하늘을 지향하며 옆으로 두루 덕을 끼치는 생명 존재’, 이것이 내가 이해한 나무다. 진리든 정의든, 아니 사랑까지도 모두 이 안에 포섭되어 있지 않을까? 계명 60년의 역사란 이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움직인 사람들의 흔적이고, 또 그들이 세우고 가꾼 캠퍼스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 아닌가 싶다. 여기에 누구의 이름이 앞서고 어느 건물이 더 훌륭하고 무슨 수목이 더 아름다운지, 순서를 매겨야 한다면 참으로 가혹한 선택이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그러한 선택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계명의 초석을 다짐
때는 1955년 5월 20일, 대명동 본관의 자리에 초로의 한 외국인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주춧돌 위로 첫 삽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돌에는 ‘1955’란 숫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또 이런 글귀가 보인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계명기독학관의 설립을 인가 받은 지 1년 만의 일이다. 땅에 주춧돌을 놓으며 목표한 ‘그의 나라’는 최소한 하늘나라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대명동의 황량한 언덕에 에드워드 아담스가 머릿돌을 놓으면서 계명대학은 출발했다. 1895년 태어나자마자 선교사인 아버지의 품에 안겨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아담스는 1965년 미국에서 죽기까지 대구에서 선교와 교육에 헌신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다 되었지만 계명으로 인해 그의 이름은 더욱 빛나고 있다. 오랫동안 대학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미술대학으로 용도가 바뀐 대명동 캠퍼스의 아담스 기념관을 비롯하여 성서 캠퍼스의 정상에 우뚝 솟은 아담스 채플이 그 증좌이다.

●1960년대, 계명 건축미학의 구축
계명대를 말함에 아름다운 캠퍼스의 조영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성이다. 그것은 붉은 벽돌에 하얀 대리석 기둥, 그리고 담쟁이덩굴과 수많은 수목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서정적이고도 고전적인 캠퍼스의 정취는 물론, 관상용으로 기획된 것은 아니다. 강인하고 창조적인 생명력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결합이라는 탁월한 생태 이상의 구현이다. 그런데 계명대 캠퍼스 미학의 한 전형이 된 ‘대리석 기둥에 붉은 벽돌과 담쟁이덩굴’은 추성엽이란 건축가의 이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한 덕래 추성엽은 1959년에 계명대의 건축 책임자로 임명되어 1980년대 말까지 기념비적인 건물을 많이 지었다. 대명 캠퍼스의 캠벨 기념관, 노천강당, 쉐턱관, 아담스관, 그리고 성서의 영암관, 체육관 등이 모두 그의 손길을 거쳐 탄생된 것이다. 2013년 계명대는 공대 뒤에 건축대학을 새로 지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건물의 이름을 덕래관이라 명명하였다.

●70년대, 학문의 동산으로 발전
에덴동산 같은 계명대의 건설에는 제3대 학장 신태식 박사의 노고를 빼놓을 수 없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육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신태식 학장이 쏟은 노력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캠퍼스 구석구석을 다니며 나뭇가지 하나, 풀 한 포기에 애정을 쏟았다. 당시 신태식 학장의 의지에 따라 캠퍼스 조경업무를 맡았던 김도엽 처장은 양복을 입고 출근한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척박한 돌산에 나무를 심고 잔디를 심어 키우는 데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렇게 계명대학은 수많은 악조건을 이기고 70년대 말에 종합대학으로 발돋움하며 승승장구했다.

교육과 연구를 위해 아름다운 계명 동산을 구축한 신태식 박사의 호가 ‘동산童山’인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童山은 ‘에덴동산’이나 ‘놀이동산’이라 할 때의 동산이 아니다. 童山은 나무 없는 ‘민둥산’이란 뜻이다. 여기에, 자신은 민둥산으로 헐벗더라도 캠퍼스는 수목 우거진 동산으로 만들겠다는 신태식 박사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 의지를 우리는 매일 체험하고 있거니와 특히, 대명동 캠퍼스의 동산관이나 성서의 동산도서관은 그러한 신태식 박사의 공로를 표명하는 작은 흔적이다. 동산도서관 앞에는 박목월 시인이 童山에 대해 쓴 시비가 하나 있다. 하얀 대리석 시비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만일 나의 증언이 미약한 것이라면/우리 모교의 돌덩이 하나하나가/풀 포기포기가 입을 열어/증명해 줄 걸세.”

●지역사회의 후원과 응원
오늘의 계명대가 있기까지 멀리는 외국인에서 가까이는 수많은 지역 인사들의 조력과 참여가 있었다. 후자의 대표 격으로 의양 정재호 박사를 꼽을 수 있다. 의양은 삼호그룹을 일으킨 한국의 저명한 기업인으로서 60년대부터 거액의 기부를 하며 계명대 발전에 동참했다. 대명 캠퍼스의 의양관과 성서 캠퍼스의 의양관은 모두 그의 공로를 기리고 있다. 그의 부인 역시 학교 법인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학교 발전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숲속의 명품 기숙사 명교생활관은 바로 그의 이름 박명교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7년에는 의양의 아들 정규진도 계명대의 발전이 자랑스럽다며 거액을 기부했다. 여기서 음대의 해담 홀이 탄생하는데, 해담은 바로 정규진의 호이다.

●성서 캠퍼스의 완성
1980년대부터 시작된 계명대의 성서 캠퍼스 시대는 주로 현 총장인 신일희 박사가 이끌었다. 미국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한 그는 1974년에 계명대 독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학자로, 교육자로 활약을 하다가 1978년에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 후 다시 여러 차례 총장으로 선임되어 계명대의 발전에 지속적인 공헌을 해 오고 있다. 특히 선지자 같은 혜안으로 성서 캠퍼스를 계획하고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게 한 주인공이다. 성서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아름다운 건축물이 하나 있으니 바로 행소 박물관이다. 2004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대명동에서 성서로 이관 건축된 박물관이다. 연간 6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을 만큼 지역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행소行素는 바로 신일희 박사의 호이다. ‘소박하고 겸허하게 행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물론 사인私人 신일희는 실로 소박하고 겸허한 사람이지만 학교를 생각하고 기획하는 계명의 리더로서는 심오하고 거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오늘의 계명이 가능했겠는가.

●타블라 라사, 유토피아를 위한 비움
성서 캠퍼스의 본관으로 들어가다 보면 정면에 커다란 백지 그림이 한 장이 붙어있다. 무슨 특이한 추상화인가 싶어 다가가면 그 아래 다음과 같은 말이 붙어있다. 「TABULA RASA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 1995」. Tabula Rasa는 라틴어로 ‘백지’란 뜻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비유로,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처럼 빈 상태라는 의미로 철학사에서 경험론자들이 즐겨 썼던 말이다. 60년 역사의 계명인데 백지라니, 과도한 겸손 아닌가? 아마도 숙연한 미래의 꿈을 담고 있는 역설인 듯싶다. 사실 참된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계명만의 고유한 얼굴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유토피아이다. ‘아직 아닌noch-nicht’ 이 유토피아는 그러나,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최소한 가능성의 계기들은 이미 60년의 역사 속에 선취되어 있다. 수시로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개교 60주년을 맞아 우리 계명인 모두는, 어떻게 저 타블라 라사를 ‘구체적인 유토피아konkrete Utopie’로 형상화할 것인가 하는 도전적인 질문 앞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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