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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평론] 한국의 표절 기준은 무엇인가?

- 신인만 사형선고 내리는 표절시비


표절은 한 마디로 남의 창작물을 훔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자주 논란이 되는 건 누구나 유혹에 시달린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산다는 건 곧 도둑질 (Life is robbery)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생명은 자연의 에너지를,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도둑질 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어쩌면 생각하고 표현하는 그 모든 행위 또한 다른 이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대한 모방이나 반추일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명제는 태고로부터 유효하다. 그럼에도 서구에서는 표절을 범죄로 엄격히 단죄한다. 개인의 양심에만 맡기기엔 공동체에 끼치는 해악이 치명적이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비슷해진 것도 표절 판정을 받는다. 보고 들었을 법한 경로가 추정되면 혐의를 피할 수 없다. 그 유명한 헬렌 켈러도 젊은 시절 이런 판정을 받은 적 있다. 어쨌든 사회적 단죄가 엄격하면 개개인이 늘 조심하고 경계하는 풍토가 자리잡을 수 있다. 적어도 대놓고 베끼는 일은 시도할 수 없다.

최근 한국방송작가협회가 <구미호-여우누이뎐> 1회에 대해 표절판정을 내리고 작가를 1년간 자격정지시켰다. 이 작품은 KBS 드라마공모 당선작으로 고전의 재해석과 현대적 감수성을 잘 살린 콘텐츠로 호평받은 바 있다. 총 16부작 중 문제가 된 것은 1회인데,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가 남편과 십년을 살다 마지막 하루를 남기고 남편을 떠나는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중반이후 오프닝 자막으로 임충 작가의 <전설의 고향-구미호>편에서 아이디어를 따왔음을 명백히 밝혔다. “표절 의도는 없었고 문제가 된 첫 회는 임충 작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존경)”라는 제작진의 해명이 납득이 가는 이유다. 이번 사건으로 그간 설화로만 여겼던 구미호의 비극이 임충 작가의 창작물이었음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간 숱하게 재창작된 구미호 이야기는 물론 최근작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등은 젖혀두고 오직 ‘오마주’임을 드러낸 작품만 처벌하는 것은 안타깝다. 유독 ‘어디선가 본 듯한’ ‘그 밥에 그 나물’이 넘쳐나는 드라마 업계가 표절 시비에서만은 ‘공정한’ 청정구역인 것일까? 김수현 작가는 2007년작 <내 남자의 여자>가 무명 신인작가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시비에서 법원의 무혐의 판정을 받은 바 있다. 피어보지도 못한 신인은 작가로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장됐고, 노(老)대가는 이 격정 멜로로 불로초를 드신 셈이 됐다.

논문 표절이 밝혀져도 공직에서 낙마되지 않는 나라에서 이미 인기 가수인 자는 표절곡을 대놓고 히트시키는 사회에서, 이번 사건은 낯설고 씁쓸하다. 이미 반열에 오른 자는 무명신인과의 표절시비에서 언제나 이겨오지 않았던가. 방송작가들이 작가에게만 가혹한 것도 아쉽다. 신인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처벌을 내리는 진짜 이유는 고령화사회 승자독식의 전형 같다. 공모를 통해서도 이제 진입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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