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4일, 제중원 마당에서 ‘초기 제중원 원형 재현 봉헌식’이 이뤄졌다. 고통 받는 민중을 구제하고 치료하는 집을 의미하는 제중원은 영남지역 최초의 서양 근대식 병원이자 우리학교 동산의료원의 전신이다. 제중원은 조선 후기, 외과적 수술 및 감염병에 취약했던 시기에 개원해 이듬해 여름까지 1천7백여 명의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천연두 예방접종, 제왕절개 수술 성공 등 지역 의료 발전에 기여해 왔다. 현재 청라언덕에 복원된 제중원은 새로운 지역 역사 문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 들어가기 2024년 올해는 계명대학교 창립 125주년이 되는 해다. 계명대학교가 창립 125주년이라 하는 것은 현 계명대 동산의료원의 전신인 대구 제중원(濟衆院)이 1899년 개원한 것에 연유한 것이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계명대는 1954년에 개교하였으므로 올해가 개교 70주년이 된다. 19세기 말 대구, 경북지역에서 기독교 3대 사역, 즉 말씀 전파와 치유(治癒), 교육사역을 위해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던 대구, 경북 기독교 선교의 선구자 안의와(安義窩, 1867~1920) 목사는 1987년 11월 대구선교부 사랑채에서 남문안교회(현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하고 1899년 12월 대구선교부 내 하인들이 사용했던 초가집에서 치유사역을 위해 의사인 장인차(張仁車, 1869~1951) 의료선교사와 함께 대구 제중원을 설립, 개원했다. 안의와 목사는 또 대구선교부 내 초가 행랑채에 1900, 1902년 남녀 초등학교, 1906, 1907년 남녀 중등학교를 설립, 개교했고 1912년경 대구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으나 당시는 일제 강점기인데다 건강 악화 등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4년 대구에 온 지 23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30년
1899년, 안의와 선교사와 장인차 선교사는 동산병원의 전신인 대구 제중원을 개원했다. 제중원은 고통받는 대중을 구제하고 치료하는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대구 최초의 서구식 병원이다. 우리학교는 창립 125주년을 기념해 역사의 시발점을 기억하고자, 2023년 2월 초기 대구 제중원 복원 사업을 시작해 올해 5월 마무리됐다. 건물은 흔히 초가삼간이라고도 불리는 세 칸의 작은 초가집이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부터 약제실, 수술실, 진찰실 및 작은 약방으로 운영됐다. 동산병원은 대구 현대 의료사의 시작이었으며, 의료 외에도 사회·경제·문화·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현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초석은 건축물의 기둥 아래를 받쳐 상부로부터의 하중을 지반으로 고르게 전달한다. 또한 지반과 기둥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아 지반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에 의한 기둥의 부식을 방지하기도 한다.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기 위해 그랭이질을 한다. 그랭이질은 기둥을 세우기 위해 자연석의 면을 따라 기둥뿌리에 본을 그려 긁어내는 일을 뜻한다. 처마를 보면 볏짚을 고정하고 비로 인한 나무의 부식을 막기 위해 사용된 다양한 건축 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 서까래 밑에 위치한 긴 대나무는 지
우리학교의 시초는 1899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비롯된다. ‘제중원’은 대구의 근대 의료 서비스의 시작을 알린 대구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이러한 제중원 설립에 기여했던 선교사는 안의와 선교사와 장인차 선교사였다. 안의와 선교사는 누나 안애리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교사를 꿈꿨고, 1897년 일본과 부산을 거쳐 대구에 자리를 잡은 뒤 선교 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낙후된 의료시설로 죽어가던 환자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안의와 선교사는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장인차 의료선교사를 대구로 초청했다. 두 선교사는 처음에는 의약품을 제공하기 위한 미국약방을 설립했고, 이후 환자들에게 본격적인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 ‘제중원’을 개원해 환자들을 돌보았다. 장인차 선교사는 연간 5천여 명을 진료하면서도, 근대식 의료 강의를 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안의와 선교사는 제중원을 이전하고 확장하는 등 제중원을 관리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두 선교사의 노력으로 오늘날 제중원은 동산의료원의 전신이자, 의과대학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안의와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안두화 선교사는 대구 기독교 교육 학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54년 ‘계명기독학관’ 개관을 이끌었다.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