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는 금강산 및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 중 하나인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다. 쌍계사는 여성 산신을 모신 산신각이 있는 국사암에서 출발했다. 신라시대 혜소선사가 세운 국사암은 민애왕이 그를 국사로 삼아서 생긴 이름이다. 진감국사 혜소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현재 쌍계사에 위치한 육조금당이다. 육조금당은 당나라 때 중국 선종을 세운 육조 혜능의 머리를 모신 곳이다. 혜능의 머리를 쌍계사에 모신 얘기는 고려 각훈(覺訓)의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에서 연유한다. 신라시대 때 육조 혜능을 쌍계사에 모신 것은 인도의 달마대사 이후 육조 혜능에 이르는 중국 선종의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계종의 수행법은 일자 무식자이자 나무꾼 출신이었던 혜능의 돈오돈수에 기초한다. 그래서 불교시대였던 신라의 스님들에게 혜능은 석가모니에 버금갈 만큼 위대한 스승이었다. 진감국사 혜소의 법명 중 ‘혜’도 혜능을 사모한 흔적 중 하나다. 전통시대 한국의 스님 중 ‘혜’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혜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지눌은 혜능의 법문을 기록한 『육조단경(六
전라남도 나주는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 명칭을 낳은 큰 도시다. 고려 현종 9년(1018)부터 조선시대까지 나주는 나주목(羅州牧)이었을 만큼 전라남도의 중심지역이었다. 나주는 고대사회 고분으로도 유명한 도시지만 나주객사 금성관(錦城館)도 유명하다. 금성관은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에서 딴 이름이다. 금성은 백제시대의 ‘발라’를 통일신라시대 말 경덕왕 때 사용한 나주의 옛 이름이다. 조선 성종 때 지은 금성관은 조선시대 객사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현재 보물로 지정 예정인 금성관은 이곳에 드는 순간 큰 규모에 압도당한다. 금성관의 또 다른 ‘보물’은 금성관 뒤편에 살고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다. 6백50살 정도의 은행나무는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나무다. 성리학 공간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의 행단에서 유래한다. 은행나무를 두 그루 심은 것은 이 나무가 암수딴그루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는 서울의 성균관을 비롯해서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충남 아산의 맹씨행단,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금성관 근처의 나주향교 대성전 앞에도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살고 있지만, 아쉽게도 문이 닫혀서 암수를 확인하지 못했다. 은행나무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정원은 성리학자들의 인생관이 서려 있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더불어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리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의 ‘백운동별서정원’은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李聃老, 1627-1701)와 후손들의 삶과 철학이 담겨 있다. 이담로는 월출산 옥판봉에서 흘러오는 물로 유상곡수와 정자를 만들어 즐겼다. 그가 즐긴 것은 도(道)였고, 그가 추구한 도는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착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백운동별서정원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그의 후손인 이덕휘(李德輝, 1759-1828)와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이다. 백운동별서정원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다산 정약용과 차 때문이었다. 강진 유배시절 이곳에 들린 정약용은 별서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白雲洞圖)》를 그리게 하고, 자신이 직접 8수, 초의선사 3수, 윤동 1수를 지어 백운첩(白雲帖)을 만들었다. 정약용이 지은 시 중 제1경인 옥판봉은 월출산 최고봉이자 현재 이곳에서 생산하는‘백운옥판차’의 이름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한 조선시대 떡차는 정약용의 건강을 지켜준 은인이었다. 정약용은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