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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계명의 현장

나는 무엇을 얻고 왔을까 ?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이번 봉사활동에서 가슴 깊이 와 닿는 한 문장이 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라.”

정말 이 말이 이번 봉사활동에서 제일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처음에 떠나기 전에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만 해도 한국과 너무나 다르고 열악한 환경이라 생각했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해 걱정도 앞섰지만 봉사활동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즐기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봉사활동을 하러 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마음속에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6월29일이 되었다. 어렸을 때 소풍가는 마음처럼 설레어 전 날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벽 일찍 집합하기로 한 학교로 향했다. 어쩌면 길고 어쩌면 짧은 12박13일인데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니 진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봉사라는 단어 하나로 뭉치 30명이 집합시간에 맞혀 모여들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이제 학교를 떠나 대구 공항에서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연길로 바로 가는 비행이가 없었기 때문에 북경에 들려 연길로 향했다. 봉사도 하기 전에 기다림에 지치는 것 같았다.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만이 우리를 반겼다. 그렇게 우리는 봉사활동을 하는 흥안소학교에 들어섰다. 그 때의 설렘을 말로 형용 할 수 없다. 드디어 7일간의 봉사활동이 시작된 것 같았다. 숙소로 들어갔을 때는 한 번 더 크게 놀랐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숙소는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정돈 되어있었다. 정말 큰 배려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흥안소학교에서 첫 밤을 맞았다.

다음날 우리의 일정대로 새벽6시에 기상하여 운동을 하였다. 나는 그 곳에서 요리를 맡았다. 조원 오빠 한명과 둘이서 첫날부터 엄청 바빴다. 교수님과 선생님을 포함 31명분의 음식을 제시간에 맞추려니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정말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모두 자신의 맡은 바에서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나의 키와 비슷한 큰 삽으로 땅도 파보고 분수대정리도 하고 흥안소학교 아이들과 재미있게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7일이지만 정말 단 하루가 지나가는 것처럼 빨리 지나갔다.

7월2일에 봉사활동 중간 평가 시간을 맞이했다. 모두들 우리들의 봉사활동을 돌이켜보면서 새로운 다짐과 또 봉사활동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열악한 환경이 많았다. 또한, 제일 힘들었던 것은 화장실과 세면실이 아니었나 싶다. 절수로 물이 나오는 시간에만 나왔다. 물 한방을 한 방울의 소중함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옛날의 나였다면 채소하나를 씻으면서 엄청난 물을 사용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물이 부족한 환경에 있으니 주어진 물의 양에서 조절하고 사용하였다. 또 하나의 배움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나라의 환경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한 일이였으니 큰 배움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모든 봉사활동이 끝을 향 할 때 선생님께서 보너스를 하나주셨다. 중국, 북한, 러시아가 맞물려있는 국경지역을 보러갔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통일전망대 같은 곳이었다. 북한을 바라보면서 정말 만감이 교차하였다. 비록 단 한번도 밟지 못한 북한이지만 왜 그렇게 측은함이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한 민족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너스를 받고 기분 좋게 소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또 하나의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중국에서 유명하다던 발 마사지를 시켜주셨다.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침대에 누웠다. 근데 정말 시원하긴 했나보다 바로 잠이 들었다. 며칠동안의 피로가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학교로 돌아와서 이제 3일 밖에 남지 않은 봉사활동시간을 보면서 아이들과 엄청 아쉬워했던 생각이 난다. 이 봉사활동 단원들을 보면서 나는 또 하나를 배운 것 같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밝은 모습 단 한명도 힘들다 아프다 투정하지 않고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에 감사하면서 뿌듯했다. 어쩌면 이런 국외 봉사활동이라는 기회를 학교에서 얻지 못했다면 우리는 영영 모르고 지냈을 사람 들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행운아들이 모여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짐했었다. 여기서와 같은 존재가 되리라고 하나의 일로 똘똘 뭉쳐 거대한 에너지를 내뿜는 이 봉사단과 같은 곳에서 한 일원이 되리라고 다짐했다.

이번 봉사활동이 그런 곳이었다면 나는 또 다른 곳을 찾아 그 곳에서의 일원이 또 되리라고 그 만큼 나에게 행복하고도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우리 봉사단이었다. 커다란 나의 자부심이 부끄럽지 않는 것은 우리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모인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자랑하려고 모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하나 남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역량을 나눠 주려고 모인 것이기 때문에 나의 자부심이 크다 해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다. 우리 단원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줬을 때는 봉사를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을 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봉사활동의 마지막 날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다른 여정을 떠났다. 바로 문화탕방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연변대학을 방문했었다. 여기서의 대학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우리와 다른 환경의 대학생들도 만나보고 싶었다. 허나 아쉽게 거기도 우리와 같이 방학이라서 대학생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우리 민족의 정기의 산 백두산을 향했다. 정말 두근거렸다. 이번 봉사활동에서 안 설레고 기대하지 않은 곳은 없지만 백두산은 지금생각해도 정말로 기대를 안고 갔었다. 백두산을 올라가기 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안개가 자욱했었다. 처음부터 안내하는 분이 천지를 깨끗하게 볼 수 있는 날이 1년에 많아야 3~5번 정도 밖에 없다고 듣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정말 잘 보이게 해달라고 바라고 또 빌었는데 안개를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아쉬움을 안고 우리는 천지를 향해 지프차를 타고 올랐다.

근데 이게 웬일이었을까! 정상에 올랐을 때는 밑에서 보는 거와 다르게 천지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의 간절함을 백두산이 알아준 것일까! 난 믿을 수 없었다. 입에서 연신 탄성을 쏟아냈다. 그 말로만 듣던 우리 민족의 산 바로 백두산의 천지가 나의 눈 속에 담기고 담겼다. 가슴이 나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이고 두근거리고 벅찼다.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찼다. 행여나 날씨가 나빠질까봐 모든 봉사단과 선생님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누르기 시작했다.

나도 여기저기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혼자서 준비해왔던 봉투하나를 꺼내 백두산의 흑 한줌을 담았다. 나의 작은 목표였다. 봉사활동을 오기 전부터 꼭 백두산에 가면 흙 한줌을 가지고 오리라고 백두산은 우리의 산인데 중국인들은 자신의 산인 것처럼 입장료를 받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입장료를 주고, 주인이 주인의 산에 입장료를 주고 들어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일까? 나는 한번쯤 백두산을 오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타까움과 더욱 백두산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왔으면 한다. 그렇게 백두산을 뒤로하고 백두산 물로 온천욕도하고 다음날은 용정이라는 곳을 향했다.

우리의 민족들이 강제로 일제시대 때 이주하고 전쟁으로 피난 와서 정착한 곳이었다. 이 곳을 지나가면서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았다. 용정은 석탄이 많은 곳이었다고 했다. 그 석탄을 캐는 인부는 당연 우리나라 민족들이었고 혹사당하고 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아직도 큰 무덤이 있는데 그곳을 파면 몇 만구의 뼈들이 있다고 한다. 나는 백두산과 이 용정을 돌아보면서 마음이 저리도록 아팠다. 그리고 느꼈다. 더욱 우리나라에 대해서 당당해지고 자부심을 가지리라고 나와 같이 많은 젊은이들이 느끼고 더 이상 이런 아픔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봉사도 문화탐방의 마지막 날 우리는 만리장성에 올랐다. 올랐을 때 비가 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리장성 보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오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한 눈에 만리장성이 보였다. 그 희열은 대단했다. 모든 사람들이 곳곳에서 환성이 터지고 우리들도 내려오던 발걸음을 뒤로 한고 연신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와서인지 행운이 따라 다니는 것 같았다. 만리장성을 구경 할 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이 높은 곳에 몇 백 톤이나 되는 돌들을 어떻게 날랐을까? 정말 불가사이 한일이라고 하는 말이 믿어진다. 지금처럼 과학과 수송수단이 발달되지도 않았을 것인데 모두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실로 엄청난 일이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또 이동을 하여 자금성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건축들은 정교하고 아름답다면 중국은 크고 웅장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웅장함이 나의 기를 탁 막는 것 같았다. 나의 눈은 피로함도 잊고 열심히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자금성에서 특이한 항아리 하나를 보았다. 북경은 강이나 바다가 멀리 떨어져있어 자금성에 큰 항아리를 곳곳에 두어 물을 구경했다고 했다. 그 큰 항아리는 또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했는데 혹 불이나면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받아 놓는다고 했다. 그 항아리에 한문으로 글이 써져있다고 했는데 그 한문을 찾으면 그 날은 좋은 일이 있다고 했다. 우리 단원모두 그 한문을 찾기 위해 한참을 살폈다. 근데 행운아는 바로 나였다. 그 글자들은 항아리 주둥이 바로 밑에 작게 쓰여 있었다.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했을 시장에 도착했다. 이것저것 흥정하고 서툰 영어와 중국어 실력으로 더듬더듬 가격을 깎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웃기다.

선물을 마음껏 사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정말 좋은 경험을 한 곳이었다. 다음은 서커스 공연을 보는 시간을 가졌다. 엄청 기대를 하고 가서인지 빡빡한 일정에 지쳐있어서인지 지루하기도 했지만 사람의 몸으로 저런 묘기를 한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음식을 먹으면서 처음에는 왜 그렇게 입에 맞지 않았는지 힘들었지만 한국에 돌아오니 그 음식도 엄청 그립기만하다. 그렇게 문화탐방까지 마치고 우리 모두 호텔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이라 조 모임을 가졌다.

그 날 아쉬움과 좋았던 추억을 하나 둘 꺼내놓으며 우리 조는 밤을 홀딱 새었다.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없었다. 드디어 진짜 중국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우리는 북경공항으로 출발했다. 어느 단원은 태풍이 불어 하루 더 함께하자는 말에 모두들 배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저렇게 공항에 도착하여 대구공항을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정말 행복한 기억들과 추억들 그리고 안타까움까지 모두 모두 잊지 않으려고 비행기 내내 마음에 담고 또 담았다. 어쩌면 우리 봉사단과 선생님, 교수님 모두 함께 했기에 더욱 행복한 추억을 많이 남겼는지도 모른다.

아마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인연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영원히 잊지 못 할 것이고 늘 감사하면서 나는 살아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안전을 위해 고생하신 윤병구 단장님, 공일남 과장님, 장요선 선생님께 이 자리를 통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계속 될 우리의 인연들 봉사단 모두 고맙고 정말 행복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기회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이 글을 보는 모든 이들이 도전하길 바랍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면서 말입니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