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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계명의 현장

2006년 하계 국외봉사할동을 다녀와서......

2006년 6월 29일 드디어 2만 명의 학우를 대표하여 중국으로 긴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날 밤 설레는 가슴을 뒤로 안고 얄팍한 잠으로 눈부신 새벽을 맞이했다. 12:30에 우리는 중국 본토를 향해 강력한 비행기의 엔진처럼 날아갔다. 연변에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안락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이제 나에게 있어 이것은 하나의 추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연속을 이루어가도록 할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13일간 있었던 모든 것들을 회상해보자.

뜨거운 더위는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우리 30명은 각각의 요소로 이루어진 강건한 한 개의 물체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중국 연길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진행되었다. 작업반장이라는 직책은 보다 더 나를 여유 있게 해 주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건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우리!! 30명을 하나로 만드는 작업. 바로 이것이 나에게 첫 번째 임무이며 마지막 임무였다. 30명의 봉사대원들을 통솔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예롭게 가치 있는 임무임에 틀림없었다. 낮엔 작업반장으로서 봉사대원의 중심이 되었고 밤엔 선배로서의 후배들의 중심이 되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가는 느낌을 가지게 해 주었다. 강력한 신뢰관계 속에서 힘든 작업도 척척 수행해 나갔다. 다섯 봉우리의 찰흙은 우리에게 깊은 선물을 주었다. 우리는 다섯 봉우리의 흙들은 뭉개어 하나의 평탄한 밭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랑을 만들어 파를 심어야 했다. 남자대원들은 모두들 군엘 갔다 온지라 조금의 문제없이 작업을 수행했지만, 여자대원들에겐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힘든 기색 없이 보다 더 강력한 의지로 모두들을 놀라게 했고 감동을 전해주었다. 계속되는 삽질과 텃밭의 돌멩이를 제거하는 작업에서 우리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고 결코 지치지 않았다.

첫 번째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우리는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바로 분수대 작업이었다. 인공조형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시멘트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갖가지 도구와 철수세미를 가지고 열심히 시멘트를 벗기기 시작했다. 작업 도중 많은 대원들은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여 훌륭한 일처리 방법을 제시하여 어렵지 않게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뜨거운 햇볕아래 우리는 시원한 분수대에서 용천하는 물줄기를 맞으며 작업의 피곤을 가시게 했다. 이렇게 두 번째 임무를 무사히 마쳤고 마지막 임무인 흥안소학교의 잡초제거와 유치원 페인트 작업이었다.

힘센 남자들은 유치원의 페인트 작업을 하기위한 준비과정인 기존 페인트 제거작업을 맡았으며 여자대원들은 잡초제거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 대원들을 존경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임무에 매진하는 모습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우리 봉사대원들의 피부는 매력적이고 열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작업의 속도 또한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으며 보다도 효율적인 생산성을 경험하게 했다. 짧은 휴식시간도 반환하며 주어진 이무를 수행하려는 모습은 작업반장을 비롯한 흥안소학교의 관계자들에 감동을 전하게 해 주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결코 짧은 시간이 되지 않았다. 봉사활동의 마지막 날. 분수대의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시원하고 멋스러운 분수대 가운데 ‘계명분수대’라는 작은 글귀는 우리에게 명예로움을 전해주었으며 다시 한번 우리는 무사히 2만 명의 계명학우를 대표로 한 봉사대원의 임무를 무사히 마쳤구나! 라는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우리가 일주일간 머문 흥안소학교는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한 민족으로 구성된 학생과 선생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엔 비슷한 한글을 사용하는 관계로 우리의 민족이라 생각했지만, 이질감을 느끼게 한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국기게양식에서의 특유의 사회주의 냄새와 약간의 어색한 얼굴과 행동들이 대표적이었다. 작업지원에 힘쓴 여러 선생님들과의 대화에서도 역시 여긴 중국이며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것을 교과서에서가 아닌 현지에서 체험할 수 있었다. 간혹 이해하기 힘든 구석도 많았다.

예를 들어 ‘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느냐? 오늘 못하면 내일하면 되고, 내일 못하면 내일 모레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대목에서 중국의 민족성과 국가정서를 느끼게 해주었다. 봉사활동의 반 이상을 연길에서 보내고 우린 그동안의 보금자리였던 흥안소학교를 뒤로 하고 연길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문화탐방에 대한 흥분과 기대는 우리들을 초등학교 시절의 보다 더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안내해 주는 역할을 했다.

우리가 늘 접하는 ‘백두산’, 하지만 한국전쟁의 분단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하나의 이상적인 산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과의 수교로 우리는 중국 영공과 영토를 이용하여 과거 우리의 자랑이던 백두산을 등정하게 되었다. 지극히 운이 좋아야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천운이 따랐는지 우리 봉사대원들은 신비함에 싸여진 백두산 천지를 느끼게 할 수 있었다. 웅장한 모습의 백두산은 나를 제압하는 무거운 기운으로 온몸을 감싸 안았다. 짜여진 여정으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지프차에 몸을 싣는 순간 비바람과 함께 안개가 엄습하였고, 우린 다시 감탄사를 자아냈다.

다음날 30명의 봉사대원들은 중국수도인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싫었다. 이른 새벽 공기를 마시며 우린 북경 국제공항에 무사히 안착했으며 바로 숙소를 이동하였다. 2시간 남짓 달콤한 침대와의 시간을 보내고 만리장성과 자금성 위한 발 빠른 행보를 시작하였다. 중국의 거대함과 수업시간에만 듣고 보던 사진은 나의 머릿속에서 힁하며 사라져갔다. 이것이 과연 인간이 건축한 인공물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과연 대국 중에 대국이구나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중국을 무시하는 경향을 많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곳을 한번 다녀온다면 그런 얄팍한 생각들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급성장하는 중국을 보며 ‘12세기에 전 세계를 재패했던 문화를 다시 한번 재연하지 않겠느냐? ‘ 는 기대와 함께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 난 주마등같이 지나간 지난 시간들을 거슬러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너무나 공허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저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기에 공허함을 느끼고 공허함을 느낌으로써 새로운 일을 개척해야만 되는 그러한 본능이 나의 뜨거운 심장을 더욱 요동치게 한다. 이제 내일이면 미국으로 향한다. 약간의 두려움도 없다. 중국 하계봉사활동에서 체득한 강력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소정의 목표를 획득할 것이다. 2주간의 안전하고 물신양면에서 이끌어주신 윤병구 단장님, 공일남 팀장님, 장요선 선생님께 깊은 존경심과 감사함을 전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하나의 요소임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것들을 훌륭하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교육이며 이 교육은 바로 우리 계명대학교에서 받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