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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체육,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에 환호하지 않는다


역대 최다인 13개의 금메달 획득, 종합순위 7위, 박태환ㆍ장미란 등 많은 스포츠 스타 탄생. 지난 베이징 올림픽 기간동안 온 국민은 흥분과 감동,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높은 자긍심을 만끽하였을 것이다. 여세를 몰아 한달 뒤 개최된 전국체전에서는 한국신기록이 쏟아지고 수많은 관중이 몰리는 등 그 어느때보다도 한국 체육은 최고의 중흥기를 맞이한 듯 보인다.

그러나 올림픽 폐막 직후인 지난 9월 2일, KBS 1TV의 ‘시사기획 쌈’이라는 프로그램은 ‘슬픈 금메달’이라는 제목으로 역대 금메달리스트들의 과거와 오늘의 삶을 재조명하며 ‘체육강국’이라는 영광 뒤에 가려진 체육계의 어둡고 숨기고 싶은 사실들을 여과 없이 방영하였다.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선전으로 한참 고무되어 있는 체육계와 우리 선수들의 감동적인 승부를 통해 힘든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국민들에게는 큰 실망감을 안겨주는 프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진실은 항상 불편한 법이다.

언론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올해 체육계에는 큰 이슈가 하나 있었다. 지난 3월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한체육회가 ‘스포츠분야 인권향상을 위한 협약’을 공동 체결한 것이다. 이에 두 기관은 운동선수들의 인권 침해 실태를 철저히 조사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선수, 지도자, 학부모를 대상으로 ‘2008 스포츠분야 인권교육’을 실시해 왔다. 황영조, 장윤창, 전이경 등 유명 스포츠스타가 폭력예방 및 올바른 체육문화 정착에 대해 강의하고 시민단체는 학부모와 학생선수들을 대상으로 앞으로의 진로 및 장래에 대해 상담을 진행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방송에 출연한 금메달리스트들이 전하는 이야기와 인권교육에 강사로 참여한 스포츠 스타들이 말하는 경험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젊음을 포기하고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피나는 노력으로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서 값진 금메달을 땄지만, 은퇴 후 남은 것은 20년이 넘도록 오르지않는 100만 원의 연금과 계약직 지도자 자리, 그리고 부담스러운 ‘금메달리스트’라는 꼬리표가 전부라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주최한 ‘스포츠분야 인권향상을 위한 지도자ㆍ학부모 워크숍’에 토론자로 나선 김재엽 교수(동서울대 경호학과)는 방송에서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파벌싸움으로 인해 유도팀 코치에서 물러난 뒤 이혼과 수차례의 사업실패로 자살까지 시도해 봤다는 그는 차라리 금메달리스트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학생선수 학부모들을 향해 반드시 자녀들에게 공부를 시키라고 당부했다. 엘리트체육 과정을 밟은 올림픽 메달리스트 대부분이 어릴때부터 공부는 뒷전이고 운동만 해왔기 때문에 선수생활이 끝나면 갈 곳도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운동부 학생들은 대부분 오전수업만 받고 오후부터는 운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나마 이것도 중학교까지나 가능하고 고등학교부터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전국대회 4강 이상의 성적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학교수업은 전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비교육, 반인권의 사각지대인 합숙소 생활은 필수적이고 잦은 시합출전으로 인한 수업결손, 입상경쟁으로 인한 뒷돈거래와 승부조작 등 학생선수들은 기본적인 학습권은 물론 선수 이전에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최소한의 인권마저 박탈당한 채 승리만을 강요당하는 ‘성적지상주의의 실미도’에 갇혀 운동기계로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국회는 학생선수의 인권과 학습권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학생체육대회의 평일개최 금지, 최저학력제의 도입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학원체육 정상화를 위한 촉구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달 뒤 국가인권위원회도 학생선수들이 신체의 자유 및 인격권 등을 침해당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학생선수 인권 보호 및 증진을 위한 정책 권고’를 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지난 10월 29일 교육과학기술부가 학생선수의 운동경기 대회 참가 자격에 일정한 성적기준을 요구하는 최저학력제 도입과 각종 대회의 평일개최를 자제시키겠다고 밝혔다. 한 해 동안 시ㆍ도교육청이 주관하는 학기 중 대회가 1184개인 점을 감안하면 주무부처인 교과부에서 이러한 정책을 내놓은 것은 참으로 반갑고 다행스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으로 반짝할 수는 있지만 해마다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학생선수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저출산 현상도 하나의 원인이겠지만 학습이냐 운동이냐는 양자택일적 선택을 강요당하는 우리나라 엘리트체육의 구조가 부모들로하여금 귀한 자식을 장래가 보장되지 않은 운동선수로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다. 24시간 통제된 합숙소 생활과 학생임에도 교실이 아닌 운동장에서 일과를 보내며 운동 외에는 다른 미래를 꿈꿀 생각조차 못했던, 그래서 화려한 은퇴 후엔 어느 길을 가야할지 막막해하며 방황했던 수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김재엽 교수는 말한다. ‘나는 유도에서만큼은 금메달리스트였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더 이상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실격되는 순간까지도 바벨을 놓지 않았던 이배영 선수,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8강전을 눈물로 포기해야 했던 백종섭 선수에게 온 국민이 보낸 환호와 아낌없는 박수를 들어보라. 유명 연예인의 말처럼 그들이 따낸 메달의 색깔은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이 흘린 땀의 색깔은 똑같기 때문이리라. 체육에 뛰어난 재목을 특별히 육성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운동으로만 성공할 수 없는 엘리트체육구조에서 그들이 사회에서도 제 몫을 할 수 있게 제대로 교육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에서만이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도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는 더 이상 올림픽 금메달에 환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