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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계의 별 지다

귄터 그라스, 지난 4월 13일 향년 87세로 타계

4월 13일, 독일 문학계의 별 하나가 떨어졌다. 뤼벡 발 부고는 고속 뉴스 망을 타고 전 세계로 날아갔다. 북독의 뤼벡에 기거하던 귄터 그라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라스는 누구인가? 한 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그라스는 소설가이다. 소설가? 문학이 고사한지 오래된 캠퍼스에 죽은 소설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자갈밭에 밀알 한 줌 뿌리는 심정으로 몇 자 적어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라스라는 이름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잘 알려져 있다. 첫째는 노벨상을 받은 작가라는 점이다. 문화민족이라 자부하는 한국은 노벨문학상 하나가 너무나 아쉽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스웨덴 한림원에 코리언 네임 하나 뜨지 않나, 학수고대한다. 우리도 안 읽는 소설을, 우리도 흥얼거리지 않는 시를 물 건너 코쟁이들이 알아주면 그리 좋을까?
독일은 그라스를 포함해서 8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 독일문학사에 편입되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합치면 13명에 이른다. 2004년에는 자국에서는 별 관심도 못 받던 엘리넥이 노벨상에 낙점되자 적지 않은 독일 언론들이 그의 자격을 의심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우리로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기실, 문학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소통의 장이 되는 것이 우선이고 상은 차후의 문제이다.

1999년 그라스가 노벨상을 받은 작품은 놀랍게도 그의 처녀작 「양철북」이었다. 이 소설은 1959년, 그라스가 32살에 발표한 것이니 상을 받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다른 말로 하면, 「양철북」은 출간 이후 40년 동안 국내외에서 꾸준히 읽혔다. 이 소설은 어른들의 추한 모습을 보고 성장을 거부한 아이(오스카)의 눈을 통해 나치 전후의 다채로운 사회풍경을 그리고 있다. 물론 있는 대로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귀가 아프도록 고발한다. 오스카가 메고 다니며 두드려대는 양철북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라스는 노벨상 수상자가 된 기쁨은 숨기지 않았지만 그 대상 작품이 「양철북」이라는 사실은 그리 반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양철북」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썼고, 더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는데 여기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라스는 누가 「양철북」이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신경질을 내곤 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그라스하면 「양철북」을, 아니 「양철북」만 떠올렸다. 「양철북」 외에 「고양이와 쥐」, 「넙치」, 「개들의 시절」, 「암쥐」, 「텔그터에서의 만남」, 「광야」같은 명작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라스가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된 두 번째 계기는 그의 사회 정치적 활동 때문이었다. 그라스는 일찍부터 진보적인 이념을 품고 사민당에 가입하여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는 끊임없이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는데, 독일의 문제뿐만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심지어 한국 문제에도 관심을 표명한 바, 가령 김대중, 김지하, 송두율 같은 인사들이 투옥되었을 때 탄원서를 보낸 바 있다. 2002년에는 한국에 와 대북관계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거침없이 거론하기도 했다. 그라스는 심지어 독일인들에게 금기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한 그라스에게 ‘행동하는 지성’이니 ‘도발의 대가’니 하는 다소 모순된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런 그가 2006년에는 느닷없이 17세 때 나치 친위대에 들어가 복무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어두운 과거에 남몰래 억눌려왔으며 순전히 철모르는 소년의 생존수단이었다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이 고백은 독일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나치 독일을 가장 끈질기게 비판했던 그라스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점도 충격이었지만 그걸 62년이나 지난 뒤에 새삼스레 말한 저의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양파를 까며」라는 자전적 소설에서 밝힌 사실인데, 양파의 매운 향에 실컷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그라스는 노벨상을 받은 소설가로서, 그리고 용감한 사회 비판자로서 한국에까지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색다른 모습도 있다. 즉, 그라스는 문학 외에 드로잉, 그림, 조각, 시에도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다. 자기 책의 표지나 삽화를 직접 그렸을 뿐 아니라 전시회도 종종 열었다. 언젠가 누가 “당신은 작가인가요, 화가인가요?”라고 묻자, 그라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참 웃기는 질문인데, 나는 양자택일하지 않을 때만 신이 나요.” 그라스는 또 요리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을 자랑했다고 한다. 독일인답게 축구도 좋아했다. 작가라 그런지 특히 축구 해설가들의 독일어에 관심이 많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에는 자작 시 「야간 경기장」을 낭송하는 열성도 보였다. 다섯 줄 밖에 안 되는 이 시의 묘미가 쏠쏠하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치솟았다/ 보니 관중석이 꽉 찼다/ 외롭게 골대 앞에 시인이 서 있다/ 그런데 심판의 호각소리, 오프사이드. 글쟁이 아니랄까 봐 골키퍼에게서 시인의 외로움과 불안을 보고 있다.

그라스는 방대한 어휘를 구사하는 언어의 마술사로 통한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그림이나 조각 공부는 해도 문학을 따로 배운 적은 없다. 그저 책을 많이 읽고 열심히 썼을 뿐이다. 누군가 그라스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글을 쓰게 하는 것이 뭐냐?”고. 그라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책 Bucher”이라고 했다. 책이 책을 쓴다는 것이다. 그렇다. 글쓰기에 독서만한 지렛대가 어디에 있겠는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더니, 어느새 글쓰기 선생이 되어 있노.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