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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품은 골목, 대구골목투어 - 두 번째 이야기

근대문화골목, 길 하나로 대구 근대문화를 품다!


지난 경상감영달성길에 이어 두 번째로 걸을 ‘근대문화골목’은 대략 1.64km로 탐방하는데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근대문화골목은 대구 의료·교육의 출발지인 동산선교사 주택을 시작으로 대구에 경제 발전을 가져다준 화교협회를 종착점으로 한다. 이번 호에서는 소설 ‘마당깊은 집’의 김원일 작가를 비롯하여 약령시에서 3대째 한약방을 운영 중인 이용식 씨, 많은 시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미도다방의 정인숙 여사를 직접 만나 대구 근대문화골목을 추억해보았다. 그들의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가며 바쁜 삶 사이에 쉼표를 그려보자. 그럼 지금부터 옛 기억들을 따라 즐겁게 걸어볼까?


● 의료·교육의 출발지, 동산선교사 주택

이번 코스의 시작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동산선교사 주택이다. 개화기에 지은 선교사를 위한 주택들로 현재 보존이 잘 되어있어 스윗즈주택, 챔니스주택, 블레어주택이 각각 대구유형문화재 24, 25, 26호로 등록되어있다. 이 주택들은 1981년 우리학교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여 사택으로 사용하였다가 1997년에 의료선교박물관으로 개장하였다. 선교박물관인 스윗즈주택에서는 개신교 교회사에 관한 사진자료와 여러 종류의 성경 및 선교유물을, 의료박물관인 챔니스주택에서는 동·서양의 의료기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교육·역사박물관인 블레어주택은 조선시대 서당, 1960년대 초등학교 교실과 시대별 교과서가 전시되어 있다.

의료선교박물관 해설가는 “동산선교사 주택은 대구 의료·교육·선교 사업의 중심이었으며, 1910년부터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1921년부터 활동한 동산의료선교복지회는 지금까지도 지역 복지와 장학 사업 등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 대한 독립을 외쳐 부르다, 3·1 만세 운동 길

동산선교사 주택에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아득하게 뻗어 있는 계단이 보인다. 계단 칸 수가 90개여서 90계단이라고도 이름 붙여진 3·1 만세 운동 길이다. 쭉 뻗은 길에 펄럭이는 태극기와 푸른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물결이 3월 8일 대구에서도 일었는데, 당시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성서학당 등에 재학 중이던 각 학교 학생들이 이 길로 일본순사의 눈을 피해 몰래 독립운동장소로 이동했다. 3·1 만세 운동 계단 옆에는 1900년대 초 대구 사진과 3·1운동 당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용기 있게 독립을 위한 투쟁을 했던 학생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대신 말해준다.

김용익(계성고등학교·역사교육) 교사는 “서문시장에 장이 서는 날이 3월 8일이었습니다. 그 전에 계성고등학교 아담스관 지하에서 학생들은 태극기를 인쇄하고 그리는 등의 준비를 했었죠. 그리고 당일에 모여서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또는 일제의 눈을 피해 장꾼 차림으로 일제에 저항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장꾼들도 하나 둘 합세해 만세를 외쳤습니다. 교사들과 학생들이 주도해 독립에 대한 염원을 외침 속에 담았습니다.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체포당했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는 현재의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 마음 속에도 길이 남아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대구·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 계산성당

3·1 만세 운동 길에서 내려오다 보면 저 멀리 높이 솟아오른 고딕양식의 성당이 보인다. 현재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이다. 계산성당은 사적 29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남지방 최초로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자 대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1900년대 건축물이다. 1899년 지금의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성당과 유사하게 한옥형태로 지었으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이 났다. 그 후 1902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당시 프랑스에서 온 로베르 신부가 공사를 지휘했다.

계산성당 심인섭(계산성당·사무장) 씨는 계산성당에 대해 “조선시대 당시 조정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충청도 내륙과 대구 인근의 천주교 신자들이 가급적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대구로 모이면서 교세가 크게 성장한 곳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께서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하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신부 서품을 받은 곳이기도 하죠. 현재는 중구 골목투어 코스로 지정되면서 전국에서는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 경북지방 최초의 기독교회, 제일교회

계산성당 정면 맞은편, 동산선교사 주택 옆에 크고 웅장한 교회가 보인다. 주변보다 높이 솟아있는 교회의 우아한 모습이 이국적인 느낌마저 준다. 제일교회는 대구·경북 최초의 기독교회로 선교사들이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했던 거점이었다. 1895년 부산에 있었던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대구로 옮겨지고, 1898년에 기와집을 교회로 사용했다. 점점 신도가 늘어나자 1908년에 전통양식과 서양 건축양식을 합작시킨 새로운 교회당을 지었다. 1933년 신도들과 중앙교회의 성금을 모아 교회를 짓고 남성정교회에서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일교회는 의료 선교 사업과 교육 선교 사업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해 왔다. 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재 동산병원의 뿌리이자 대구·경북 지방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제중원이 설립되었고 희도·신명·계성학교 등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제일교회는 1994년 대구광역시 중구 옛 영남신학교 부지에 신축되어 현재 계산성당을 마주보는 자리에 위치해있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마주보고 있는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 전국 한약재 중심지, 대구 약령시

중앙파출소 건너편으로 이어진 길을 걸으면 향긋한 한약 향기가 코끝을 건드린다. 약령시 골목 속 저마다 각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약방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향기로움을 내놓는다. 대구 약령시는 좋은 약재가 나는 지방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약재를 사고파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어 자연히 약재의 유통 시장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658년 진상품으로 올리기 위해 관찰사의 명에 따라 약령시의 한약유통시장이 개설됐다. 대구 약령시는 300년이 넘는 전통을 품고 현재는 관광지로서 대구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약령시는 원래 춘령과 추령 두 번의 장을 세워 개방했는데 이것이 현대로 이어져 매년 봄 한방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 축제는 세월호 사고로 연기되어, 오는 10월 1일부터 5일까지 진행한다.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한방문화축제를 즐기며 한방의 매력을 느껴보는건 어떨까.


● 선조들의 항일의 역사, 이상화·서상돈 고택

소박하면서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상화·서상돈 고택은 서로 마주보며 위치해있다. 이상화는 항일정신을 담은 문학작품으로 잘 알려진 시인이며 고택에는 그의 항일정신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담아낸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고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상화 정신을 알리기 위해 서예 작품을 꾸준히 기부해온 혜정 류영희(한글서예협회·공동회장) 서예가는 “저는 이상화 선생의 항일 정신에 직접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서예 작품들을 통해 고택의 멋스러움을 살리고 그의 정신을 한층 높이고자 작품을 기부하게 되었죠”라고 말했다. 신동학 이상화기념사업회 대표는 “독립운동가이자 장군인 형 이상정과 아우 이상백 등 이상화의 형제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보고, 이상화 시인의 유품도 함께 관람해보기를 바란다”고 추천했다.

서상돈은 1907년 나라의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국민을 단결시킨 자발적인 사회운동의 모범이라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제일교회로 올라가는 길에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서상돈을 비롯한 경상도 지방의 애국지사들을 만나볼 수 있다.


● 또 다른 대구 경제발전의 원동력, 화교협회

종로를 따라가다 보면 다른 건물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대문이 보인다. 고개를 들면 ‘화교소학(華僑小學)’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이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화교들은 계산성당을 짓기 위해서 1901년 대구에 처음 들어왔고 1905년에 경부철도가 개설되면서 많은 화교들이 대구에 정착했다. 이는 종로 일대의 발전을 가져왔다. 화교는 1949년에 대구화교경제가 번성해 대구부호 서병국의 저택 중 일부였던 대구화교협회 건물과 소학교 부지로 이전하면서 완전히 이 터전에 자리잡게 되었다.

대구화교협회 제27대 장여림 회장은 “대구 화교 역사가 100년이 넘었지만 화교인들이 아직 이방인처럼 외롭게 살아가고 있어 대구시민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취임 소감을 밝혔다. 화교들의 개척지인 종로 일대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중국문화축제가 열린다. 곧 다가오는 10월,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화교문화를 직접 알아보고, 가까워지는 계기를 가져보자.


이번 호에서는 ‘대구골목투어 두 번째 이야기-대구근대역사의 발자취’를 주제로 대구 속에 구석구석 추억으로 녹아있는 근대골목여행을 떠나보았다. 독자들에게 대구의 근대역사가 가까이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줄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다음 호에 떠나볼 곳은 ‘삼덕봉산문화길’이다. 다음 코스에서는 대구시민들의 삶에 배어있는 따뜻한 삶의 향기를 맡아볼 것이다.


● 인터뷰1 - 종로 그 안의 장관동, 김원일 소설가

"지난 시절을 지워버리지 않고 옛 모습을 보존하는 사업은 후대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해줄 것"


소설 ‘마당 깊은 집’에 대해서

장남 길남이 신문팔이, 신문 배달을 하며 겪고 본 전쟁이 끝난 직후의 대구 정경을 묘사했습니다. 셋방에 같이 살던 개성댁, 평양댁, 상이군인 가족, 김천댁, 주인댁 가족을 하나하나 집어내어 그들의 삶의 형편과 생각을 그렸습니다. ‘마당 깊은 집’은 대부분이 실제 경험담입니다.


어릴 적 그때

청소년기의 고생은 천금을 주고 못 산다는 말이 있듯, 집안의 가난이 저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듯, 열등감에 차 있었던 청소년기라 말이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청소년기에 저는 열심히 책을 읽고 경험담을 글로 남기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대구, 제2의 고향

대구는 1954년부터 1969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낸 제2의 고향으로 학창시절 신문팔이와 신문배달을 했던 아픈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여전히 약전골목과 종로 거리, 화교 학교 등 대구는 50년대 그 시절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시절을 지워버리지 않고 옛 모습을 보존하는 사업은 후대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해줄 것입니다.


● 인터뷰2 - 진골목 속의 미도다방, 정인숙 여사

"다방이야말로 한국의 정서를 잘 담고 있는 곳 젊은이들도 가끔 찾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아름다운 도시, 미도다방

‘아름다울 미’와 도시의 ‘도’를 합친 단어로써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을 가진 미도다방은 1928년부터 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지식을 나누었던 지성인들의 모임장소였습니다. 당시 지성인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할 만한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미도다방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죠.


편안한 휴식공간이 되길

저는 미도다방이 누구나 마음이 복잡하고 외로울 때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마음의 위안과 안정을 찾는 편안한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커피뿐만 아니라 그 속에 진실된 말과 마음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미도다방을 운영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정서를 담은 다방

다방이라고 하면 재미없고 노인 분들만 찾는다는 인식이 퍼져있습니다. 하지만 다방이야말로 한국의 정서를 잘 담고 있는 곳이죠.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프렌차이즈 카페가 친근하고 익숙하겠지만 우리의 정서를 담은 다방도 가끔 찾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인터뷰3 - 약령시 기억 담은 광신한약방, 이용식 씨

"광신한약방은 3대에 걸쳐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져 현재의 약령시는 먼저 길 닦은 선배들의 노력과 서민들의 관심으로 존재"


약재 유통의 중심지, 약령시

원래 약전 골목은 경상감영공원 앞쪽에 위치해 전국 곳곳의 약재를 사거나 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 거래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읍성이 허물어지면서 그 빈자리에 한약방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현재 약령시가 있는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현재도 약령시는 약재 거래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넓은 믿음, 정직함을 기본으로

광신한약방은 조부님께서 30년, 선친께서 30년, 제가 45년째 운영하고 있어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광신한약방의 광은 ‘넓을 광’, 신은 ‘믿을 신’입니다. 넓은 믿음이라는 뜻이지요. 저는 정직함과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뢰가 생겨야 장사도 하고 성실하게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감성에 맞는 약령시로

현재까지 약령시가 존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한의약박물관을 만들고 길을 정비하는 등 약령시에서 먼저 터를 닦아놓으셨던 선배들의 노력과 시민들의 관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더욱 노력해서 약령시를 현대 감성에 걸맞는 장소로 만들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기자칼럼] 가해자들의 도피처, ‘심신미약’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선 잔인한 사건들이 보도된다.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보도,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 2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남성, 2011년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몸속에 손을 넣어 숨지게 했지만 상해치사로 종결된 사건 등이 그러하다. 이 잔혹한 사건들의 처리과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비원 2명을 살해한 20대 남성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심신미약 주장이 인정돼 일부 감형되었고, 같은 회사에 다니던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피해자에 입힌 상해 정도가 심각하지만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4년형을 받았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을 이유로 처벌은 가벼운 수준에 그쳤다. 잔혹한 살인을 했음에도 ‘심신미약’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형법 제10조를 살펴보면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을 하지 않거나 형을 감경한다.’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심신장애란 인지·지능·언어·정서·행위 등의 심신기능 면에 장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