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토지. 그리고 박경리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멸의 역작 《토지》 집필 초기,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 박경리씨가 유방암 수술을 받고도 소설을 써내려 가던 중 한 말이다.

박씨는 지난 5일 오후 2시 45분경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볕 좋은 어린이날, 어린 생명들이 뛰놀 때 문학사의 큰 획을 그은 거목은 눈을 감았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삶에서 겪은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고 했지만, 좀 더 파고들자면 박
씨가 문학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고통이 아니라 소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섬세한 촉수로 온 세상을 겪어냈던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박경리 문학의 시작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박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통영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1946년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 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잃고 외동딸 영주씨를 홀로 키우게 된다.

이 때의 경험들은 그를 소위 팔자가 드센 여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상실의 고통이 창조의 성취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전쟁 뒤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씨를 찾아갔고 그의 추천을 통해 단편 소설 ‘계산’을 <현대문학(1955)>에 게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해방 전까지는 한글을 전혀 몰랐던 상태. 한글을 익힌 지 불과 10년 만에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지금도 문단의 ‘전설’이다.

여느 소설가나 시인처럼 박씨도 등단 초기에는 주로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작품을 써냈다. ‘불신시대’(1957)는 죽은 아들을 추억했고, ‘표류도’(1959)는 실종된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암흑시대’(1958)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남매와 노모를 부양하는 여주인공 순영이 문학을 통해 상처를 달래는 것으로 나와, 박씨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1960년대부터는 개인의 비극과 아픔을 달래는 문학에서 벗어나 사회와 세계를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토지가 탄생하기까지
《토지》는 박씨가 단숨에 뱉어낸 작품이 아니다. 6·25사변 이전 그의 외할머니가 전해준 호열자(콜레라)에서 그의 상상력은 시작했다. 풍작이었던 가을이었지만 전염병으로 벼를 거둘 사람이 없었다는 말에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단다.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상상이 바로 집필로 이어지진 않았다. 1960년대 들어와 박씨의 소설은 내면의 방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온다. ‘김약국의 딸들’(1962)과 ‘시장과 전장’(1964)이 대표적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과 욕망이 이 두 작품의 중심 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토지》다.

◆토지 그리고 박경리
《토지》는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 <문학사상(1972)>, <주부생활(1977)> 등 7개 매체를 거쳐 25년 만에 5부 21권으로 완성됐다. 그 동안 박씨는 세상과 단절한 채 초인적인 집념으로 글쓰기에 몰두했다. 당시 문단에서는 토지 집필을 ‘생명을 건 사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고,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토지》는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서울,만주,일본을 거쳐 다시 평사리 섬진강가로 돌아온다. 특히 1부의 주 배경인 경남 하동 평사리와 2부 용정은 박씨가 온전히 지도에서 본 지명일 뿐, 그는 집필 도중 한 번도 이 곳을 찾은 적이 없다.

줄거리는 최참판댁 손녀 서희가 역사의 소용돌이를 따라 하동에서 하얼빈까지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는 것이다. 그 안에 동학농민전쟁, 을사보호조약,청일전쟁,1902년 7월 전국에 번졌던 콜레라,1909년 간도협약,일제의 토지조사사업,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1923년 형평사 운동,1937년 만주사변 등의 역사적 사건이 등장한다.

특히 이 안에 나온 578명의 인물 모두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허구이며, 인물이나 사건을 하나의 주제에 종속시키지 않았다는 점은 서구의 소설 이론과 다른 새로운 실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토지 이후
《토지》 완간 이후 박경리씨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는 최소한의 작품 활동만을 한 채 토지문화관 건립과 환경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다만 인간의 욕망과 사랑,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물신주의에 대한 저항,생명사상 등 이 작품의 풍부한 내용 때문에 KBS와 SBS가 세 차례에 걸쳐 토지를 TV드라마로 제작했고,1974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다.

1995년에는 광복 50주년 기념 서사음악극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졌으며,청소년 판과 만화로도 작품이 출간됐다. 하동 평사리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평사리에서는 해마다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2003년에는 현대문학에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도 했으나 세 차례만 실은 채 미완으로 남겨졌다. 올 들어서는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발표하며 마지막까지 창작 의욕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