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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붉은 악마 해체 이후, 응원문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애국심 마케팅'이나 '스포츠 국가주의'를 경계


응원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드넓은 경기장에서 그저 손뼉치고 함성지르는 것에 불과한 행위지만 그것의 발생 과정과 변천 및 서로 다른 응원 행위의 교체는 한 시대의 집합적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증거자료다.

1998년에 프랑스 월드컵 바로 전 해에, 지역 예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부 프로 축구단의 서포터스들이 중심이 되어 ‘붉은 악마’라는 작은 모임이 생겨났고 그들이 서서히 축구 국가대표팀의 응원을 주도하면서 지금까지 10년의 세월 동안 ‘12번 째 선수’ 붉은 악마 현상이 확대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 절정은 지난 2002년의 한일 월드컵 때이다. 당시 ‘붉은 악마’ 신드롬은 월드컵 직전의 5월 평가전 때부터 시작되었다. 부산 아시아드경기장에서 스코틀랜드와 평가전을 치를 때, 부산까지 내려가지 못한 회원들이 세종문화회관 뒤 분수광장에서 거리 응원전을 펼쳤고 그때 벌써 2만여 명이 모였다. 평가전의 승승장구로 급기야 10만여 명을 헤아렸고 본선 첫 경기 폴란드전은 40여만 명, 그리고 8강 스페인전에서 최대 700여만 명이 거리를 채웠다.

이 낯선 현상에 대해 대다수 방송과 언론이 사용한 단어는 ‘애국심’이었다. 그 밖의 언어는 조금도 생각해내지 않았다. ‘애국’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 수많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음을 한국의 미디어는 보여줬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2002년의 광장, 그 ‘붉은 악마’의 광장은 대단히 소중한 역사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광장에 대한 집단적 공포증을 덜어낸 사건이었다. 그 열기는 부분적으로는 4강 신화에 도취된 국가주의의 과잉도 없지 않으나 틀림없이 '실로 사람답게 살 만한 곳'을 갈망했던 문화적 열망의 다른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중앙과 지역이 서로 존중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삼투하여 각자가 저마다의 가치관과 성향을 존중하며 연대하자는 아름다운 문화적 저항이며 아름다운 시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 2006 독일 월드컵의 진행 과정에서 우리가 직접 목격했던 ‘붉은 악마’ 현상은 국가주의도 아니요 애국심도 아니요 열렬한 문화 민주화도 아닌, 그저 ‘애국심 마케팅’ 일변도의 자본의 마력 뿐이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 문화 민주화의 완전한 실천에 이르지 못한 채, 이를 위한 뜨거운 열망과 아름다운 노력을 그저 한 줌의 ‘마케팅’으로 날려 버리고 마는 허약 체질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 한복판에 ‘붉은 악마’가 있었다.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서포터스였으니만치 이들은 두 차례의 월드컵이 치러지는 과정에서, 그라운드 바깥의 가장 폭발적인 영향력을 지닌 단체로 성장하였고, 그에 따라 ‘자본의 마케팅’이 된 셈이기도 했던 2006년의 월드컵 과정에서 ‘붉은 악마’는 거대한 스케일의 응원을 주도해야 했고 동시에 바로 그 같은 이유로 ‘상업화’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붉은 악마’는 안팎으로 다양한 논란에 휘말렸으며 그에 따라 지난 2월 초에 ‘신붉은악마 선언’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로 하였다. 당시 일부 보도에서는 ‘붉은 악마’가 해체 수순을 밟는다고 했지만, 그 ‘신 붉은악마 선언’은 공중분해식의 해체는 아니었다. 그동안 다소 과잉되었던 양상을 조정하면서 영원히 마르지 않을 축구에 대한 열정을 소박하면서도 신선한 형식에 담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이는 해체가 아니라 모색이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붉은 악마’가 내린 결정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회원 저마다가 서로의 조건과 입장에서 주고받았을 진지한 논의는 우리 축구 문화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결절점이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1997년부터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98년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 악마’의 싱그러운 깃발을 휘날린 지 어느덧 10년이다. 20대의 아름다운 혈기로 참여했던 회원은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견실한 나이가 되었다. 그 세월만큼 ‘붉은 악마’는 내용과 형식에서 상당한 성장을 하였고 그에 따른 성장통도 심하게 앓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국내 스포츠 문화에서는 보기 드문 열혈 서포터스 문화를 일궈왔다는 점이다. 그들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떤 영리의 목적이나 스포츠 외적인 몫을 노리고 그와 같은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가능한 스포츠 산업이나 정책에 참여하면 될 것이지, 굳이 혹서기와 혹한기를 막론하고 늘 경기장 북쪽 스탠드를 가득 메울 필요는 없었다. 10년 역사 동안 ‘붉은 악마’를 기반으로 무슨 정치적 행세를 하거나 그릇된 이익을 도모한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은 그 영향력과 회원 수를 감안하건대 대단히 아름다운 족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는 두 차례의 월드컵, 특히 작년의 독일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사회 전체가 일종의 ‘애국심 마케팅’이라는 그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불가피하게도 ‘붉은 악마’는 그 한복판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거대 퍼포먼스’에 대한 집중이다. 국가 대항전의 특성 때문에 엄청난 열기를 그라운드로 쏟아부을 필요는 있지만, 그럼에도 최근 몇 년 동안 ‘붉은 악마’는 거대한 스케일의 퍼포먼스라는 형식에 너무 치중했다. 이러한 과잉은 팬 저마다의 수많은 열정이 다양한 수로를 통해 축구장으로 촉촉히 스며드는 내실 있는 응원으로 이어지는 것을 가로막기도 했다. 관중이 함께 응원하는 게 아니라 ‘붉은 악마’의 퍼포먼스를 구경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점을 성찰하건대 굳이 ‘붉은 악마’를 해체할 필요는 없다. 거대한 스케일의 퍼포먼스 대신 소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응원의 형식을 찾아내면 될 일이고, ‘애국심 마케팅’이나 ‘스포츠 국가주의’를 경계하면서도 각 지역의 축구장으로 낮게 스며들면 될 일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일정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주의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상업화의 노리개가 되지 않으면서, 과잉된 민족주의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우리 사회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문화 민주주의와 참다운 연대의 한 가능성을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붉은 악마를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