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집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슬픈가? 물론 슬프다. 그러나 슬프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슬픔은 못 된다. 나의 슬픔에는 그런 권리가 없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렇다면, 슬프다고 말할 수 있는 슬픔이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그 순간 깨닫게 된다. 슬픔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픔은 ‘말할 수 있음’이라는 가능성의 영역에 속한 게 아니라 ‘말로 할 수 없음’이라는 불가능의 나라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다. 슬픔은 쏟아지는 것이다. 목소리를 빌려서, 얼굴을 빌려서, 몸을 빌려서…… 더 빨개질 수 없을 때 떨어지는 사과처럼, 더 부풀 수 없을 때 터지는 풍선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바닥이거나 찢긴 채 버려진 상태로 존재하는 것들. 어떤 슬픔은 시간을 찢고 나오듯 자신을 찢고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정확한 설명이라고 해도 그 목소리를 대체하지 못하며, 그 얼굴을 대신하지 못하며, 그 몸을 대변하지 못한다. 그것은 잠시 우리를 빌려 세상에 뿌려진, 불가능의 나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뿐이다. 시고 달고 때로 텁텁한 그 전부로서의 사과를 깨물듯이, 직전의 떨림을 간직한 채 점점 투명해지는 풍선을 불듯이 혹은 노랗게 구워지는 두부를 바라보듯이. 이를테면 우리는 슬픔을 가질 수 없다. 슬픔이 우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아니 생활이라는 형식으로, 이 시집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미래’라는 환상으로 말이다. 내 슬픔에 권리가 없는 것과 무관하게 이 시집을 사랑할 권리는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이 시들에 대해 명백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그저 활자들의 집합이라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활자들 속에서 길을 잃는 이유는, 그 작고 구부러지고 휘어지거나 어느 대목에서는 아무렇게나 끊겨 있는 그것들 속에 ‘우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의 나라가 있음을 촘촘하게 증명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찾아 헤매었으나 여기 조용히 활자로 잠들어 있는 그 웅덩이이자 돌멩이이며, 흩날리는 낙엽들로 말이다. 이 시들이 가진 목소리이자 얼굴이며 몸으로 말이다. 겨울을 향해 익어가는 두부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