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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인정한 110년 전 그들의 의지

국민들이 국가의 빚을 갚아내려 한 세계 최초의 기록

1907년은 대한제국의 말기이다. 이 당시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한국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연이어 1905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 결과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해갔다. 그로인해 일본의 한국 통감부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초대통감은 먼저 한국의 경제적 침략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07년 누적된 외채는 1,300만원 정도가 되었다. 이 금액은 당시 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것도 연리 6∼7%의 고리대금이었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다음의 글은 ‘국채보상운동취지서’의 한 대목이다.

“(…) 지금 우리나라의 외채가 1,300만원이나 되는데 금년에 갚지 못하고 내년에도 갚지 못하여 해마다 이와같이 하면 그 이자가 원금에 해당될 것이니, 이러한데도 갚지 못하면 나라를 보존하기 어렵고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우면, 아! 우리 동포들이 장차 어디에서 생명을 붙여 살 수 있겠습니까? (…)”

위의 취지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으로부터 들어 온 외채를 갚아 경제적 주권을 수호하자는 운동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다. 이 운동은 대구에서 1907년 2월 21일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남자들이 담배를 3개월 끊고 그 돈으로 외채를 갚자고 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여성들은 “남성들만이 이 나라의 백성인가, 나라를 위한 마음과 백성된 도리가 어찌 남녀가 다를 수 있겠는가”하며 반지와 비녀를 뽑아 의연금 대열에 동참했다. 번듯한 유생들만 동참한 것이 아니라 걸인도, 기생도, 백정도 의연금 수합소에 줄을 섰다. 철모르는 아이들도 “내가 나라를 위해 의연금을 냈다”고 의연금 영수증을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당시 신문은 전하고 있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전파되어 전국민이 동참하는 구국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최근들어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의 실상을 전해주는 기록물들이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당시 시장에서나 마을에서 낭독되었던 취지서가 수십 점이 존재한다. 한지에 붓글씨로 쓰여진 것들이다. 그 취지서들을 신문에 게재하였는데 그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을에서 의연금을 모으면서 발행했던 영수증도 몇 점이 발견되었고, 마을 의연금 수합소에서 작성했던 의연자 명단과 의연금액을 수록한 성책도 여러 점 발견되었다. 우리는 이 기록물들을 정리하고 해석하여 프랑스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하였다. 2년간의 심사를 거처 금년 10월 31일에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에 세계적 보물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심사위원회(IAC)는 오늘날 세계자본주의가 국가부채, 가계부채의 늪에 빠져있는 현실을 주목하면서 외채의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110년 전의 한국 국민의 부채갚기 운동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특히 국가가 진 빚을 국민이 금연 동맹과 패물 폐지를 통해 갚자는 국민적 기부운동은 일찍이 보고된 바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2,700여점의 원본 기록물들이 40년에 가까운 일본 식민지기간 동안에도 온존 되었고, 3여년에 걸친 한국 전쟁 동안에도 소실되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유전되고 있으니,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기록물과 그 기록물에 담겨있는 정신을 인류가 보존하여 후손에 물려줄 세계적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당시의 국채보상운동은 한반도 전역에서 조용히 세계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 때 언론이라고 하면 신문뿐이었다. 민족신문이 열심히 이 소식을 국민들의 안방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높은 문맹률을 생각하면 신문을 통해 들은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국민에게 전해진 것이다. 일본에 와 있던 한국 유학생이 3월 3일 단연동맹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모임을 갖자 이를 지켜 본 일본인들이 더 감동을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지방공립협회가 3월 25일에 국채보상운동 발기문을 발표하는 것을 필두로 해서 뉴욕, 하와이로 확산되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도 4월 20일에 의연금 모금이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의 깃발이 올라간 지 불과 두 달 만에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전파력이다.

이 운동이 유럽으로 알려진 것은 이준 열사에 의한 만국평화회의가 계기가 되었다. 만국평화회의에 입장조차 하지 못했던 이준 열사는 7월 9일 회의장 밖에 마련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지금 한국 국민들은 눈물겨운 단연운동과 반지·비녀 폐지운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세계시민에게 호소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의 국채보상운동 정신은 1909년 중국의 국채상환운동으로, 1938년 멕시코의 외채 보상 운동, 그리고 1945년 8월 베트남의 ‘황금주(Gold Week)’라고 불리는 외채 상환 기부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현대에 와서는 외환위기 및 금융위기 때 1997년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이나, 1998년 태국의 금모으기운동, 그리고 2017년 몽고의 금모으기운동으로 연결되고 확산되었다. 이와같이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은 점진적으로 세계 근현대사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해가고 있었는데, 이런 점에서 이번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현대를 사는 우리는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세계의 보편적 시민운동으로 승화시킬 과제를 안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 세계경제가 앓고 있는 국가부채 혹은 가계부채의 문제를 국채보상운동 정신으로 어떤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110년 전 국민의 책임을 다하려 했던 우리의 선조처럼 어떻게 시민책임운동으로 승화시킬 것인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책임소비, 환경책임, 책임투자와 같은 유엔의 책임운동과 어떻게 연대할 것이가? 우리가 받아 들고 있는 국채보상운동의 유산을 가지고 시민의 집단지성으로 이러한 문제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자마당] 봉사활동으로 채워지는 꿈 영원히 미성년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성년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즐겨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스물두 살의 대학교 3학년이 되어 ‘청소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몇 년간 봉사해 오니, 이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로를 향한 작은 불씨는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직업으로 삼아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복지를 지원하고, 클라이언트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큰 불씨로 번지게 되어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한 첫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분들께 ‘편지 작성 및 생필품 포장, 카네이션 제작’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봉사는 아니었지만, 빼곡히 적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드릴 수 있었기에 뜻깊음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직접 대상자와 소통할 줄 알았는데 해당 봉사는 대상자와 면담하지 못하고, 뒤에서 전달해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장애아동어린이집‘에서 활동한 겨울 캠프 활동 보조일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동들이 다른 길로 가